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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대통령 사태’ 베네수엘라, 경제 파국에 탈출하는 국민

2013년 좌파 마두로 취임후 6년간 경제 쇠퇴 거듭 규모 ‘반 토막’ 베네수엘라 국경서 ‘구호품 반입’ 충돌… “4명사망·300여명부상”
‘한 나라 두 대통령’ 사태로 극도의 정국혼란에 휩싸인 베네수엘라가 지난 1월 28일(현지시간) 자국 통화 가치를 약 35% 평가절하하는 등 경제가 수렁에 빠지면서 조국을 등진 국민들이 연일 탈출하고 있다. 

또한 지난달 23일 베네수엘라 국경에서는 미국 등이 제공한 원조 물품 반입을 둘러싸고 정부군과 야권이 정면 충돌하면서 4명이 사망하고 300여 명이 부상을 입는 최악의 유혈사태도 발생했다.

2013년 니콜라스 마두로가 대통령에 처음 취임한 이후 6년간 베네수엘라 경제는 쇠퇴를 거듭해 규모가 '반 토막'이 났다.
세계 최대 원유 매장량을 보유한 베네수엘라는 2014년 이후 한동안 이어진 국제유가 하락세와 미국의 경제·금융 제재, 막대한 정부 지출, 무분별한 화폐 발행 등으로 초인플레이션과 최악의 생필품난을 겪고 있다.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물가상승률이 1천만%까지 치솟을 것으로 전망했다. IMF가 물가상승률 전망치로 제시한 ‘1천만%’는 현대 경제사에서 거의 유례를 찾기 힘든 수준이다.

살인적인 물가상승, 식료·의약품 등 생필품난에 더해 정정 불안을 견디지 못해 2015년 이후 인구의 약 10%(3천278만명)에 육박하는 300만명이 조국을 떠나 콜롬비아나 페루 등 인근 국가로 이주했다.

이와 관련해 최근 몇 년 경제난과 정정 불안으로 나라를 떠난 베네수엘라 국민이 모두 340만명에 이른다고 국제이주기구(IOM)와 유엔난민기구(UNHCR)가 최근 밝혔다.

IOM은 340만명 가운데 270만명이 라틴 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연안 국가에 머물고 있다면서 “지난해에는 하루 평균 5천명이 더 나은 삶과 안식처를 찾아 베네수엘라를 떠났다”고 설명했다.

마두로 대통령은 국제유가 하락 속에 미국의 경제제재가 더해져 초래된 극심한 식량난 등 경제위기와 정국혼란을 못 이겨 많은 국민이 해외로 탈출하는 가운데 지난 10일 두 번째 6년 임기를 시작했다.

마두로는 작년 5월 치러진 대선에서 68%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지만, 야권은 유력 후보들이 가택연금, 수감 등으로 선거에 나설 수 없는 상황에서 치러진 대선이 무효라며 마두로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퇴진을 요구해왔다. 분열된 야권에서 일부 후보가 대선에 나섰지만 마두로 대통령의 재선을 막지 못했다.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은 지난 23일 반정부 시위 현장에서 자신을 ‘임시 대통령’이라고 선언한 뒤 미국 등 우파 국제사회의 지지 아래 정권 퇴진과 재선거 관철 운동을 이끌고 있다.

불타는 트럭에서 원조물품을 가져가는 베네수엘라인들
한편 미국 등이 제공한 원조 물품의 반입에 반대하는 베네수엘라 정부에 맞서 야권이 지난달 23일(현지시간) 물품 반입에 나서면서 콜롬비아와 브라질 접경지역에서 충돌, 3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AP와 AFP 통신은 “브라질 국경과 접한 베네수엘라 남동부 산타 엘레나 데 우아이렌에서 원조 반입을 두고 군과 주민들이 충돌해 14세 소년을 포함해 최소 2명이 숨지고 300여명이 부상했다”고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와 가디언지는 “최소 4명이 숨지고, 수 백명이 다쳤다”고 보도했다.
임시 대통령을 자처한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은 이반 두케 콜롬비아 대통령 등 일부 남미 국가 대통령과 함께 쿠쿠타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인도주의 원조가 지금 당장 생명을 구하기 위해 평화로운 방식으로 베네수엘라로 가고 있다”며 “군은 역사의 옳은 편에 서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트럭은 베네수엘라 영토에 진입했지만 세관 검문소를 통과하지 못했다.

베네수엘라 군은 접경도시인 우레냐에 있는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산탄데르 국경다리에 몰려들어 장애물을 치우려고 시도한 야당 의원들과 야권 지지자들을 해산하기 위해 최루탄과 고무총탄을 발포했다.

베네수엘라 제2 국경 도시인 산 안토니오 델 타치라에서도 구호품 운반을 도우려고 국경을 넘으려는 시위대를 군이 최루탄 등을 쏘며 해산하자 시위대는 타이어와 군복을 태우고 돌을 던지는 등 항의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또 우레냐에서 구호품 반입이 원활치 않자 버스를 탈취해 불을 지르기도 했다.
주민들은 불길에 휩싸인 트럭에서 구호품을 앞다퉈 가져갔다.

폭동 진압 장비를 착용한 베네수엘라 군은 이날 동이 트기 전에 시민들에게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 국경을 연결하는 다리에 접근하지 말 것을 지시하는 등 양국을 잇는 3개의 국경다리를 잠정 폐쇄했다. 구호품을 둘러싼 충돌을 앞두고 베네수엘라의 일부 군인이 탈영하거나 정권에서 이탈했다.

콜롬비아 이민당국은 국가수비대 군인과 경찰 등 23명이 탈영해 투항했다고 밝혔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이날 수도 카라카스에서 친정부 지지자 수천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집회에서 야권의 원조 반입을 지원한다는 이유를 들어 콜롬비아와의 정치·외교 관계 단절을 선언하고 콜롬비아 외교관들에게 24시간 이내에 자국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작년에 치러진 대선이 불법이라는 이유로 지난달 23일 임시 대통령 선언을 한 과이도 의장은 선언 한 달째인 이날 구호 물품을 육로와 해상을 통해 반입하겠다며 마두로 정권과 정면 대결을 예고했다.

거의 200t에 달하는 원조 물품은 베네수엘라 정부의 반입 차단으로 지난 7일 이후 베네수엘라와 국경이 접한 콜롬비아 쿠쿠타와 브라질 북부, 카리브해의 네덜란드령 쿠라사우 섬 등의 창고에 보관됐다.

과이도 의장을 비롯한 야권은 많은 국민이 식품과 의약품, 기초 생필품 부족 등으로 고통받는 만큼 외국의 원조를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과 야권은 표면적으로 경제난에 따른 베네수엘라 국민의 고통을 덜기 위한 명분을 내세웠지만 원조를 통해 마두로 정권에 대한 민심 이반과 군부 이탈을 내심 바라고 있다.

반면 마두로 정권은 인도주의 위기가 존재하지 않는 데다 미국 등 외세의 개입을 초래할 수 있다며 구호 물품 반입을 막고 있다.
마두로 정권은 특히 미국이 각종 제재로 베네수엘라에 300억 달러(약 33조8천억원)가 넘는 손실을 안겨놓고선 소량의 인도주의 원조를 보내는 것은 이중적이며 '정치적인 싸구려 쇼'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미국은 전날 마두로 정권이 원조 반입을 막는다면 한층 가혹한 추가 제재를 취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희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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