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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친일파 논쟁을 할 것인가

하림산책 - (박하림 / 수필가, 전 (주) 휴비츠 고문)
어느 해인가 대통령 직속기관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일제강점기의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명단을 공식으로 발표했을 때 세상이 깜짝 놀랐었다.

그 인원수가 1천 6명이나 되는 대규모라는 사실과 우리나라 각 분야의 유명한 유지인사가 여럿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친일 전력이 두드러진 인사는 정치. 통치기구, 경제사회, 문화, 그리고 해외에 고루 포함돼 있었다.

우리나라 지식인들은 그 인원규모에 놀라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졌고 반일지지자들은 금방이라도 단죄의 칼을 휘둘러 저들을 요절낼 듯이 설쳐댔다. 그런데 비등하는 여론에 몇 가지 의문이 제기됐다.

우선 민족반역자로 지탄 받아 마땅한 죄과를 단정하는 근거가 부실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때까지 공개된 친일파명단은 4가지나 되었다. 국회의원모임이 주요 친일인사라고 발표한 사람은 708명인데, 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작성해 발표한 친일파는 110명 이었다. 조사기관 간에 인원차이가 큰 것은 친일파 선정기준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다른 하나의 문제는 친일인사에 대한 빈약한 입증자료였다. 나중에 대비해 친일자료를 모아둔 게 아니라서 사람에 따라서는 자료가 없었다.

제출된 자료 또한 그 신빙성에 의문이 있었다. 친일행적에 대한 검증이나 확인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들 대부분이 이미 고인이 되었거나 생존자가 있어도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명단에 오른 사람의 후손, 후배 등 인맥에서 이의를 거세게 제기하고 나오는 경우는 해결이 간단치가 않았다. 특히 문중이나 학파 예술단체서 시시비비를 가리자고 나오면 복잡했다.

어떤 이가 그런 친일파규정의 어려움을 빗대어 우리나라가 단죄할 확실한 반역자 친일파는 매국노 <을사 5적 乙巳五賊> 뿐이라고 했다.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박제순 다섯이 매국노 괴수라는 것이다.

친일을 정의함에 있어 예컨대 먹고 살기 위해서 일본인 밑에서 고용살이를 했고 식민지통치를 따라 공무원 생활을 했다면 일제에 부역한 것이니 친일한 게 된다. 식민지의 국민으로 산디는 건 지배자인 일본에 협조하고 함께 일한다는 의미다.

나의 가문이 그러한 대표적인 예이다. 나의 선조 중에 두 분은 임진왜란 때 임금의 몽진을 호가호위(扈駕扈衛 임금을 배행해 피난함)했다가 의주에서 순절하셨고, 그분들 조카님 되는 선조께서는 임란 최초의 승전 육지전투였던 청주성 탈환전투에서 의병대장으로 싸우다 순절하셨다.

그리고 을사늑약으로 벌어진 3,1만세운동 때는 나의 조부님께서 연루돼 지명수배 당함으로 인해 집안이 기울기 시작했으니 우리가문에 일제는 원수였다.

그러나 멍문 향반가문의 자식들은 가문을 지키고 살기 위해서 학교도 다니고  시험도 치러서 세 아들이 다 도청과 소방서에 간부공무원으로 일했다.

그들은 친일 부역을 한 것인가? 가족이 모두 창씨개명을 해서 나의 경우 성이 ‘기도(木戶)로 바뀌어 살았는데 친일한 건가? 

시대정신에 어울리지 않는 국민의식이 끈질기게 우리사회를 논쟁과 불화를 빚게 만드는 사단이 있는데 그 하나가 친일(親日)과 배일(排日) 문제다.

일본은 미국을 공격해 벌인 태평양전쟁에서 군인과 서민 8천만 명에 달하는 전, 사상자를 내고 항복한 지 75년이나 지났음에도 여전히 역사적 원한의 대상인데 특히 한국국민에게 그러하다.

한일관계사를 조금만 돌이켜봐도 저들이 우리를 1세기에 걸쳐 얼마나 능욕하듯 침략해 수탈하고 분탕질을 쳐 전후복구에 무려 한 세기라는 세계전사상 그 유례가 없는 기간이 소요될 정도로 한반도를 유린했으며, 그와 유사한 맥락에서 조선을 강제로 합방, 식민통치를 36년 간이나 함으로써 한국 국민의 영원한 원수가 되었다.

일본이 백제부흥에 실패, 백제 분국처지의 ‘왜’라는 이름을 버리고 670년 일본이라는 나라이름을 선포하고 독립한 후 숱한 내전을 겪으며 발전을 계속해왔다.

도쿠가와막부 말기에 이르러 근대화운동으로 벌어진 ‘화혼양재 (和魂洋才 일본정신은 살리되 지식과 기술은 서양 것을 배운다) 운동으로 촉발된 명치유신이라는 일대 혁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했다.

그때 조선을 바라보니 도론(徒論)을 일삼는 조정은 백성을 제대로 먹이지 못해 민심이 이반된지라 나라를 보위할 힘이 없음을 간파하고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갔으니 7년간 전쟁인 임진왜란이 터진 것이다.

임란이 끝났을 때 조선은 빈사상태였다. 그러나 임금은 여전히 약했고 입만 살아 정치를 하는 조정 권신들이란 하나 같이 썩고 무책임하여 국가보위에 등한했다.

하여 거안사위 (居安思危 평화로울 때 위험이 닥칠 때를 대비함) 않는 3백 년을 지나고 임진왜란을 당해 20일도 버티지 못하고 수도 서울을 내주었듯이 이번에는 니라를 몽땅 사악한 일본제국 손아귀에 쥐어주는 합방을 당한 것이다.

세상에 무도한 칼잡이 사무라이들이 조선왕궁을 범궐하여 왕후를 시해해도 어느 조선 호위병 하나 맞선 적이 없고 어느 조정 중신 한 사람이 나서서 저 짐승만도 못한 살인자들을 꾸짖어 칼을 휘두르지 않았음은 천추에 뼈아픈 수치였다.

나라를 빼앗겼어도 무능한 임금은 수라를 거르지 않고 간이고 쓸개를 빼버린 권신들은 각자도생 일본에 붙기도 하여 제 잇속 챙기기에 급급했다.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庚戌國恥) 같은 8월이 또 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한일 양국은 5백 년 전이나 마찬가지로 사소한 갈등으로 대립하고 충돌하고 있잖은가. 지금에 와서 친일파를 밝힌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무엇을 해결한단 것인가?

한일이 계속 반목하고 충돌한다면 임란이나 한국 침략 같은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을 보장이 없다. 일본에 일어난 관동대지진 때 일본은 조선인 때문이라는 소문을 퍼트려 조선인을 무려 7천 명이나 죽게 만들었다.

태평양 전쟁으로 군인과 서민 8천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 함부로 이웃 나라와 불화하고 다툴게 아니다. 국제적으로 평화공존공영이 이상이고 미덕이라면 한일 양국은 지금의 대립관계를 친화소통모드로 하루속히 바꿔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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