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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으로 읽는 한국의 기원 - 선사시대 고조선 10

최현수 교수(KAIST 공학박사/전 건양대학교 Prime 창의융합대학 학장)
3. 古朝鮮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先史時代 동아시아의 국가


고조선의 역사행적에 관한 한국의 기록은 고려 충렬왕 때인 CE 1283년에 편찬된 《삼국유사》를 필두로 아류의 사서에 비교적 구체적인 기사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상당 부분은 史實에 기반한 기사들이었지만 일부는 당시의 정치적 목적에 따른 왜곡된 기록으로, 이들 문헌 기록을 기반으로 고조선의 역사행적을 옳게 이해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 연구는 한국의 사서는 물론이고 동북아 상고대 역사가 기록된 중국의 고대 사서에서 관련 史實이나 방증 자료를 찾아내고, 앞에서 제시한 지구과학·인류학·유전학·고고학 등의 연구의 결과를 이용하여, 절대 부족한 선사시대 고조선의 문헌 기록을 보충하고 끈긴 고리를 연결하여, 선사시대 고조선의 역사적 실체에 접근한다.

(1) 동아시아의 패권 국가인 商나라의 역사와 강역
商나라는 중국의 역사 문헌에 기록된 첫 국가로, BCE 16세기경 상족(商族)이 황하 상류 유역에 성립하여 황하 유역과 중원 내륙 지방에 분포하였고, BCE 1046년 周族의 무(武)에게 멸망당하였다.

은허는 상나라 말기의 도읍으로 크게 번성하였는데, 특히 商의 여러 지방 및 주변 국가와 농산물·축산물·수공업 제품의 교역이 성행하고 금속 화페가 사용되는 등 상업이 크게 발달하여, 나라의 이름을 商 대신에 도읍의 이름인 殷으로 불리게 하였고, ‘상나라 사람(商人)’이란 단어의 뜻이 ‘장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바뀌게 하였다.

은허에서 갑골문자로 기록된 많은 문서, 발달된 청동기 유물, 당시의 사회상을 추정하게 하는 유적 등이 발굴되어, 상나라의 실존을 증명하고 그 사회상과 주민들의 생활상을 상당부분 밝혀주고 있다.

상나라가 위치한 황하 유역은 선사시대에 황하문명이 발달했던 지역으로, 商이 형성된 시대에는 생활공동체인  씨족이나 부족들이 특정 지역의 자연환경과 사회풍습을 장기간 공유하며 대 집단화 되어 종족으로 통합되면서 부족연합 사회의 질서유지와 이웃 종족과의 갈등의 해결을 위하여 종족국가를 형성하던 시기이었다.

상나라의 통치체제는 권력이 다단계 계층으로 분할된 구조로, 수도의 직할지에는 商王을 정점으로 그 밑에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는 임명제 귀족들이 있고, 지방에는 상에 복속하는 종족국가인 방국(方國)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직할지의 임명제 귀족들은 상왕실의 친인척이거나 지방 방국의 왕으로서 이들을 직할지로 불러들여 상왕에 대한 충성심과 협력을 강화하는 체제이었고, 지방 방국의 왕들은 현지에 남아 자기의 종족국가를 자치적으로 통치하며 상왕과 협력하는 정도이었다.

이렇게, 商王과 방국의 관계는 중앙집중식 수직지배체제가 아니고 상호 협력하는 체제로,  방국은 商王에게 조공(특산물 등)을 내고 방국 주변의 변방을 방어하는 등의 정해진 역할을 담당하였고, 대신에  세습제가 많았지만 선출된 방국의 왕을 商王이 信任하고 방국에 대한 경제 및 군사 등을 지원을 하였다.

따라서 상의 방국들에 대한 통제권은 매우 약했고 상 왕권이 미약하여, 商王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방국의 왕들과 협력관계를 유지했는데, 상왕의 친인척을 방국의 왕으로 파견하거나 방국의 왕을 상왕의 친인척과 혼인케 하여 혈맹관계를 맺었고, 중요한 방국의 왕은 국가의 특정한 임무를 맡겨 직할지로 불러들였으며, 방국이 외부의 침략을 받았을 때에는 군사를 내어 방어해주었고, 방국의 경사 및 조사에 특산물이나 기념품을 보내는 등 이었다.

결국, 상의 정치체제는 종족국가인 ‘방국연맹체’로, 자치권이 인정되는 지방의 종족국가와 상호 협력관계를 맺음으로써 商에 쉽게 통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으나, 통치권이 분산되고 왕권이 미약하여 외국과의 전쟁이나 자연재해에 대응처럼 국가의 많은 자원을 긴급히 동원해야 할 경우에 대응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지방의 방국이 이해관계를 달리하여 상왕의 정책과 다른 행동을 해도 이를 통제하기 어려웠고, 이해관계에 갈등이 생기면 방국의 협조가 부족하였고 심지어는 상에 대한 반란 시도가 잦아서 상왕의 통제력이 약하고 국가의 안정성이 떨어졌었다.

상은 여러 차례 도읍을 옮겼는데, 방국들의 세력의 변화나 반란 등으로 야기된 불안정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末期에는 점차 왕권이 강화되었고, 특히 무정 왕은 강화된 왕권을 토대로 지방 방국들에 대한 대대적인 정벌을 통하여 상나라의 전성기를 열었다.

고대사를 기록한 몇몇 문헌에서 상나라의 ‘방국’을 ‘제후국’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제후’를 봉하는 ‘분봉제도’는 周나라에서 시작된 제도로 ‘제후국’이란 용어나 국가적 속성을 상나라 방국에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다만, 지방을 분할하여 통치한다는 개념은 같아 방국을 후대에 익숙한 제도와 용어로 표현했을 수는 있지만 이는 올바른 기술이 아니다.

지방의 방국은 한 종족이 특정 지역에 스스로 성립한 국가로서, 방국의 수장은 자기의 지방에 대한 독립적 소유권과 통치권이 있었고, 방국 왕의 선출은 세습제에 가까워 분봉제의 제후와 같이 ‘중앙의 왕이 자기의 통치지역을 나누어 봉’하는 것이 아니었다.

중국의 역사학자들이 밝혀낸 商 전성기의 강역은, 황하 유역의 중원 지방을 중심으로, 서북쪽 내륙 지방들과, 동북쪽으로 산동 지역·발해 서안 유역·난하 서쪽 일부, 하북성 내륙 지방으로, 그렇게 크지 않은 영역이었다.

주요 도읍은 초기 수도인 서쪽의 호경, 황하 유역의 양사오, 뤄양(낙읍), 룽산, 북쪽의 말기 수도인 은허가 있다.

商의 전성기인 무정(武丁) 재위기간(BCE 1250 ~ BCE 1192)에, 무정은 서쪽의 공방(邛方), 남쪽의 호방(虎方), 동쪽의 이방(夷方)과 용방(龍方), 북쪽의 귀방(鬼方)과 강방(羌方)과 토방(土方) 등을 정벌하여 개국 이래 최대의 강역을 확보하였다.

공방을 정벌하는데 동원된 병력이 2만3천 명에 달했고, 북서쪽 귀방 정벌에는 동원된 병력이 10만3천 명에 기간은 무려 3년이나 걸렸다.

이때, 무정의 왕비인 부호(婦好)도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방과 강방 정벌에 나섰고, 특히 강방 정벌에는 ‘벌강(伐羌)’, ‘획강(獲羌)’, ‘용강(用羌)’ 등의 다양한 전술로 영토를 빼앗고 강방인(羌方人)을 포로로 잡아 이용하였다.

산동지역에 위치했던 이방(夷方) 정벌과 산동 태산 동남부에 자리한 용방(龍方)의 정벌로 동이족(東夷族)은 산동지방을 잃고 산동반도와 요서지방 남부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서방과 남방도 해마다 정벌을 단행하여 서남방의 영토를 넓혔다.

무정의 방국 정벌 여파로 아시아에는 큰 지정학적 변화가 일어났다. 商과 방국 사이의 직접적인 전쟁에 의한 인적·물적 피해와 정복당한 방국이 속국이 되거나 멸망하는 등의 국가 정체성의 변화가 있었고, 정벌된 방국의 주민들이 상의 약탈(노예로 잡거나 재산을 탈취)을 피해 안전한 지역을 찾아 나서며 대규모 난민이 발생하였고, 난민들은 부족 단위로 여러 방향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것은, 고대 유럽에서 발생하였던 게르만 족의 대이동과 같은 사회현상으로, 상나라와 직접 전쟁이 없었던 동북아 지역의 국가들에서도 연쇄적인 종족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요서지방에 자리했던 고조선은 대릉하와 요하 유역의 요서지방 동부로 밀려났고, 화북지방에 머물렀던 상의 혈맹 방국인 고죽국은 난하 유역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어서 상나라 末期의 왕들인 제을(帝乙)과 제신(帝辛, 紂王)도 은허를 중심으로 강한 동방 정책을 펼쳐 동북아 진출을 지속하였고, 이때에 고죽국은 난하를 건너 요서지방에도 세력을 화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속된 동방정책 강화로 중원의 서방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지게 되었고, 서쪽 산서성 지역의 주족이 세운 주국(周國)이 상의 서쪽 방국들(10개로 추정)을 연합하여 상나라에 반기를 들어 공격하였고 결국 주의 연합군이 상군을 이겨 BCE 1046년 상은 멸망하였고, 周國이 중원의 패권을 차지하고 주(周)나라를 세웠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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