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말기에 언론, 교육, 신민회(新民會), 독립운동을 통해 애국운동을 폈으며 특히 신동이라 불리울 정도로 10여세 때에 사서삼경을 독파해서 세인을 놀라게도 했다.
사학자요, 지조 있는 독립운동가요, 탁월한 언론인으로 그의 생애가 점철되어 있지만 특히 학문을 하는 데는 집념 또한 무서웠고, 그로인해 사소한 일에 대해서는 아주 무관심하였던 분이다.
심지어 목욕하는 것도 잊고, 양말 색깔이 다른 짝짝으로 신을 때도 있었고, 신발의 좌우를 구분하지 않고 신고 나닌 일 등,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리고 굶주림과 헐벗음 속에서도 근대사학(近代史學)의 기초가 된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 조선사론을 비롯하여 이탈리아 건국삼걸전(建國三傑傳),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동국거걸(東國巨傑), 최도통천(崔都統傳) 등 방대한 역저를 쏟아냈다.
1905년 26세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포기하고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논설기자로 활약하여 애국심을 국민들에게 일깨우기도 했다.
그러다가 1910년 국내에서 국권 회복이 불가능해지자 안창호 선생 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광복회를 조직, 국권 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이어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한 최초 29인의 모임(임시정부발기회의)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 후 상해임시정부와 결별하고, 1910년 10월에는 상해에서 신대한(新大韓)지를 발행하여 무장투쟁노선을 지지하는 언론 활동을 하였으며 1920년 9월에는 박용만 등과 군사통일촉성회를 조직하여 분산된 독립군 부대들의 지휘계통과 독립운동 노선의 통일을 추구하기도 했다.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여,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여 온갖 만행을 거칠 것 없이 자행하는 강도 정치가 조선민족 생존의 적(敵)임을 선언함과 동시에 혁명으로 생존의 적인 일본을 살벌(殺伐)하는 것이 조선민족의 정당한 수단이다’
이 선언은 우리 민족에게 일제에 대한 적개심과 독립 사상을 한층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고 일제를 공포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평생을 오직 대한 독립과 일제에 대한 항거로 일관해 온 선생은 1928년 독립 운동 선전기관의 설립과 폭탄제조소 건립에 관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채권 200여 장을 위조하다가 중국 대련에서 체포되어 1936년 57세의 나이로 뤼순감옥에서 옥사했다.
세수할 때조차 허리를 빳빳이 세우고 고개를 든 채 두 손으로 물을 찍어다가 얼굴을 씻었으며 웃옷과 소매와 바지가 다 물에 젖는 것을 안쓰럽게 여기는 주위 사람에게
‘지금 우리 입장이 허리를 굽혀서 세수하게 되었나. 난 누구에게도 허리를 굽혀가면서 살고 싶지 않아. 더구나 일본 놈에게 나라가 송두리째 먹히고 있는 이 판국에 허리를 굽히다니, 그건 안될 말이지’
빳빳이 세우고 세수하는 것이 괴벽에 가까울 수도 있겠지마는 요즈음처럼 신념과 지조와 의를 가지고 국민들에게 본을 보여야 할 일부 지도자들이 돈과 불의와 부정에 양심을 굽히고 신념을 굽혀서 훌륭하게 쌓아 놓은 명예가 한 순간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면, 단재 신채호 선생의 꼿꼿함이 더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