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전 상서
딸 최영선 올림
마음속 깊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지 보셔요.
아빠! 우리 아빠! 라고 부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아빠라고 부르기엔 너무 어색한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네요.
어쩌다 동네 아이들이랑 놀다가 귀가가 조금만 늦어도 아버지는 문을 열어주지 않으셨습니다. 그것 때문에 엄마하고 아버지께서 많이 다투셨지요.
어린 마음에 호랑이 아버지가 계시는 집은 항상 떠나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울서 힘들어도 악착같이 버텼습니다.
그 때문에 결혼도 빨리 했던 거 같습니다.
겨울이 되어야 소나무가 푸른 것을 안다고 결혼하고 아이를 기르면서 새록새록 부모님 생각이 났습니다. 아이들이 자라 초등학교를 가고, 중학교를 가고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앞두고 있는 지금에야 아버지의 깊은 사랑이 헤아려집니다.
우리 아버지는 참으로 훌륭한 분이시다. 흔치 않는 효자이시고 시골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교육열을 가지신 분, 늘 성찰하시는 생활 태도, 이웃과의 나눔, 표현은 안하시지만 자식에 대한 절제된 깊고 자상한 사랑.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제가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어린 나이였지만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꼭 않으시고 소리 없이 흘러내리던 눈물!
제가 중학교 1학년 때로 기억됩니다. 다리에 지꺼리가 심해 딱지가 두꺼워 약을 발라도 소용이 없을 지경이자 따뜻한 물에 불려서 아프지 않도록 살살 딱지를 떼어내고 잉크약을 발라서 자전거로 학교에 태워다주시고 태워오셨죠. 그뿐인가요 초등학생 어린 저에게 늘 꿈과 희망을 주셨죠.
영선이는 어려서부터 영명해서 판사가 되면 좋겠다고 하시며 어려운 판례집을 읽으라고 하셨어요. 판례도 사건을 다룬 스토리인지라 어린 마음에도 내용이 소설처럼 재미있기도 했습니다. 지금의 제가 있음은 순전히 아버지 덕분임을 절절히 깨달아가고 있는데, 그렇게 단호하시고 무섭던 아버지의 어깨가 자꾸만 작아져 보일 때마다 가슴이 저려옵니다.
그 호랑이 같던 아버지가 이제 치아도 다 빠지고 걸음도 제대로 못 걸으시니 얼마나 답답하시겠어요. 내 몸을 내 뜻대로 못 움직이는 서러움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거예요. 아버지의 답답하고 서러운 마음을 어찌 다 알겠어요. 자식들이 그 마음 몰라주니 괘씸하고 많이 섭섭하시지요?
시골에서 힘든 형편에 우리 사남매를 재수까지 시켜서 대학까지 가르친 집은 우리 동네에서 우리 집밖에 없지요? 자식을 뒷바라지 하느라 아버지 개인의 인생도 제대로 누려보지 못하고 나이가 드셔서 여기 저기 아파 약을 식사처럼 드시는 모습을 보면서도 어떠한 조치도 할 수 없는 자식은 그저 마음만 태우는 불효자식입니다.
아버지 딸로 태어난 저는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들을 어릴 때부터 습관화 되도록 교육시켜 주신 덕분에 어떠한 자리에 가도 별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액자에 항상 걸어놓으셨던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 덕분에 어려운 일이 닥쳐도 큰 고통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견뎌내는 힘이 생겼습니다.
귀에 못이 박히게 들려주신 ‘少年易老學難成 (소년이로학난성) 一寸光陰不可輕 (일촌광음불가경)’, ‘暗室欺心(암실기심) 神目如全(신목여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저의 무의식에 쌓여 늘 작동합니다.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고 촌각을 나누어 쓰며, 늘 배움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합니다.
낳아주신 부모님은 두 분이신데 아버지께 먼저 편지를 쓰게 된 까닭은 아버지의 사랑을 너무 늦게 깨달은 후회가 크기 때문입니다. 늘 엄마가 안쓰러웠었지요. 늦게라도 아버지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존경하는 아버지!
제 아버지이셔서 자랑스럽고 감사합니다. 열심히 사는 삶의 태도와 긍정적인 인생관을 물려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