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었던 땅이 녹기가 무섭게 노란 꽃망울을 터트리는 산수유로 유명한 전남 구례는 봄 뿐만 아니라 여름·가을·겨울 등 일 년 내내 꽃 사태가 펼쳐진다. 구례군 농업기술센터에 있는 한국압화박물관 덕분이다. 이곳에 가면 작약·수국·할미꽃·물매화·물옥잠·백리향·천리향·꽃무릇·노루귀·개망초·매발톱·으아리·안개꽃·미니장미·애기사과꽃·배롱나무꽃 등을 눌러서 말린 압화(押花·Press Flower)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우리말로 ‘꽃누르미’ 또는 ‘누름꽃’이라 부르는 압화는 꽃과 열매·잎·줄기를 눌러 건조한 뒤 이를 활용한 조형예술로, 꽃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정물화에서부터 풍경화·인물화·추상화 등의 회화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응용된다. 가구·장신구 등의 공예에도 응용된다.
압화의 역사는 1521년 이탈리아의 식물학자 키네가 300여 종의 식물표본을 제작하면서 시작돼 19세기 이후 압화 예술로 발전했다. 한국압화는 선조들이 문 창호지에 꽃이나 나뭇잎을 붙여 집안에서 자연을 감상하는 풍류의 멋을 즐겼지만, 압화 예술은 1950년대 중반 플라워 디자인이 도입되면서 본격적으로 보급됐다.
‘야생화 생태특구’인 구례군은 2000년 야생화를 연구할 목적으로 압화 표본을 만들었고, 2002년부터 매년 ‘대한민국압화대전’을 개최하고 있다. 올해는 3월 20일까지 공모작(압화와 보존화)을 접수한다. 1, 2차 심사를 거쳐 4월 19일 한국압화박물관에서 시상식을 진행한다.
박노진 구례군농업기술센터 소장(한국압화박물관장)은 “대한민국압화대전을 통해 압화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며 압화 메카로서의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면서 “2016년 세계 최초로 개관한 한국압화박물관에는 대한민국압화대전 당해 연도 국내외 수상작, 압화를 이용한 생활소품, 압화 도구, 식물표본이 전시돼 있다”고 말한다.
압화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는 명소
매년 3만여 명이 찾는 한국압화박물관은 전시실을 비롯해 수장고, 체험교육관, 기념품점 등으로 이뤄져 있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세계 유일의 압화 전문박물관’이라는 문구와 압화로 꾸민 천장 조명이 눈에 들어온다.
1층 전시실에는 지난해 제16회 대한민국 압화대전 수상작이 걸려 있다. 일본·대만·중국·러시아·우크라이나·리투아니아 등 외국 작가의 작품을 통해 국가별 작품의 차이를 느껴볼 수 있다.
자연 풍경을 유화처럼 표현한 대만 진 페이 산의 ‘동산강’, 나뭇잎과 나무껍질로 해안을 질주하는 야생마를 표현한 리투아니아 타트야냐 마자제타의 ‘말’, 오래된 성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표현한 일본 모리타 카즈미의 ‘고성’, 동물을 꽃으로 표현한 중국 리징징의 ‘판다’ 등 탄성이 절로 나오게 하는 압화 작품들이 가득하다.
멀리서 보면 꽃비가 내리는 봄의 풍경을 그린 수채화처럼 보이던 작품이 가까이 다가가면 꽃으로 그린 그림이고, 자작나무 껍질과 낙엽으로 거칠게 표현한 추상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차정희의 ‘봄이 오는 들녘’에는 왓소니아, 넉줄고사리·당근꽃·접골목꽃·아디안텀, 이끼 등이 한데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물감을 전혀 쓰지 않았는데도 색감이 빼어나고, 꽃과 잎이 그대로 한 폭의 풍경화로 살아 숨 쉰다.
압화는 어떤 재료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는데, 작품 하나가 탄생하기까지는 채취부터 건조, 제작까지 많은 정성과 노력이 필요하다. 풍경·정물·인물·추상의 회화 작품의 경우 방습제를 넣고 공기가 통하지 않게 코팅처리 해서 모양이나 색이 변하는 것을 막는다.
전시실 중앙 벽면에 별도로 걸려 있는 제16회 종합대상 수상작인 ‘작약 꽃향기 가득한’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그림 속 바구니에 담긴 연보라색 꽃은 말린 작약 잎을 층층이 쌓아 만들었고, 새 두 마리가 든 새장은 나무껍질을 잘라 붙여 실제와 같은 색감과 질감을 표현했다. 어떤 꽃이 쓰였는지 살펴보는 재미도 그만인데 마치 숨은그림찾기와 같다.
박남선 작가는 창작의도에서 “작약 꽃은 화려하고 우아한 자태를 지닌,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꽃이다. 탐스럽게 피어 있는 작약 꽃을 보고 있노라면 화사함 속의 아련한 그리움과 외로움이 느껴진다. 작약 특유의 화려함과 탐스러움을 표현했다”고 밝혔고, 심사위원들은 “압화라는 재료의 특성을 잘 살리고, 전체적인 구도와 색감의 처리 등 조형적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했다.
말린 꽃, 잎, 줄기로 조형성·예술성 표현
회화와 함께 누름꽃을 넣고 평평한 유리를 얹은 테이블, 누름꽃이 담긴 장신구, 누름꽃을 붙인 가구 등 공예작품이 압화로 표현되기도 한다. 솔채·한려·버베나의 오묘한 색감은 꽃향기에 취해 나비가 날아들 듯한 ‘나빌레라’ 압화장으로, 깽이풀꽃과 잎·산자고·꿩의 바람꽃·금낭화·싸리꽃·산수국·왕제비꽃·양지꽃·미니도라지꽃 등은 블라인드로 재탄생했다.
유리 접착법을 활용한 탁자 ‘차 한 잔의 여유’는 테이블에 둘러앉아 작약·물매화·칡덩굴·크리스마스로즈 등의 아름다움을 즐기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가족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한지와 애기사과꽃·설유화·불두화 등의 누름꽃으로 만든 한복 인형, 도자기와 팔배꽃·수국·당근꽃·안개꽃 등의 누름꽃을 접목한 꽃수저받침은 갖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한다. 생화를 오랫동안 시들지 않도록 작품화한 보존화 전시 공간에선 구도와 색감의 처리 등 작품성과 함께 실용성에 감탄하게 된다.
2층 전시실로 올라가면 제1회 ‘9월의 향수’부터 제15회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압화대전 역대 종합대상 수상작과 마주한다. 제7회 종합대상을 받은 배선아 작가의 ‘화조화’는 꽃과 새를 주제로 한 민화병풍이다. 누름꽃의 멋을 살린 병풍은 매화·작약·동백·갈대·얘기나무·산당화·대나무·맨드라미·으아리·구절초·이끼·담뱃잎 등을 눌러서 말린 뒤 까치, 매, 모란, 연꽃, 수선화, 매화, 난초, 대나무, 국화 등을 표현했다. 들과 산에서 무심코 스쳐버렸던 야생화, 이름을 몰랐던 꽃들이 아름답게 보인다.
전기식압화기, 수동식압화기 등 압화 기구, 명함케이스·노리개·비녀 뒤꽂이·손톱깎이·머그잔·손거울·스탠드·큐빅 목걸이 등 압화를 활용한 생활소품과 액세서리, 지리산에서 채취한 야생화 표본 등을 둘러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한국압화박물관 옆 체험교육관에서는 컵 받침, 열쇠고리, 손거울, 타일 액자 등을 직접 만들어볼 수 있다. 야생화 힐링 정원, 야생화 유전자원 온실, 잠자리 생태관 등이 조성돼 있어 재미있는 볼거리를 제공한다.
INFORMATION
[관람시간] 10:00∼17:00
(점심시간<12∼13시> 휴관)
[휴관]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이면 화요일 휴관) ※ 3월 31일까지는 제17회 대한민국압화대전 준비로 휴관
[관람료] 성인 2천원, 청소년·어린이 1천원
☎ 061-781-7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