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학년 때 엄니 돌아가시고 고등학교 3학년 막 올라갈 때 아버지 돌아가셨으니 세월이 벌써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그리운 마음은 해가 갈수록 더해갑니다. 엄니 돌아가신 뒤 어쩔 수 없는 집안 형편 때문에 새 엄니 들어오셔 세원이 낳고 어이없게도 바로 그 이듬해 아버지 돌아가시고, 새 엄니마저 고생만 하시다가 10여년 후에 돌아가셨으니, 아마 저희만큼 부모 복 없는 형제들도 드물 것입니다. 그러나, 세원이 까지 저희 7남매 비둘기처럼 의지하며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아버지! 제가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스러운 일 중의 하나는 공주고등학교 2학년 겨울 방학 때 할머니 모시고 서울 돈암동에 있는 큰집에 와서 학원 다닌 일입니다.
허락해주셨다가 막상 서울 간다고 하니, 불길한 예감이 드셨는지 새벽 이부자리에서 일어나 앉으시면서 안가면 안 되겠냐고 힘없이 말씀하시든 모습이 저하고 마지막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쇠퉁배기라고 할 만큼 고집이 센 저였기에 막상 못 가게하면 또 얼마나 아버지 마음을 상하게 해드렸겠어요.
아버지! 엄니 돌아가시고 새 엄니 들어오시기 전까지 어린 저와 참 많은 얘기 나누셨지요. 왜정시대지만 부자로 사신 할아버지 덕에 서울에서 고등교육을 받으시고 화려하게 사시다가 잠시 낙향하셨다가 6.25를 만나, 할아버지 재력으로 세우셨다는 도산초등학교에서 평생을 계셨지만, 평소에 후두가 불편하시어 숨가빠하시던 우리 아버지, 엄니 돌아가신 뒤 조금이라도 몸이 불편하시면 ‘내가 죽으면 저 어린 것들 어떡하느냐?’ 고 안타까워하시던 아버지,
아버지의 슬픈 독백을 듣고 정화와 제가 훌쩍거리면 ‘걱정마라, 어린 너희들 두고는 안 죽는다’ 고 하시던 아버지, 공부를 잘해 우등상을 타와도 칭찬 한번 안 해주시던 아버지지만, 염정골 줄감나무 밭 인삼 농사가 잘 되었을 때는 4년이 다되어 캘 때 가 되었는데도 우리 진원이 내년에 좋은 대학 들어가면 입학금 해야 된다고 더 묵히셨는데, 결국 그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그 후로 저는 얼마나 아버지를 그리워했는지 모릅니다.
아버지! 다른 사람들은 아버지가 얼마나 자상하시고 정도 많으시며 아코디온이나 기타 등도 잘 다루시는 멋쟁이셨는지 잘 모릅니다. 저녁에 제 용돈으로 카스테라 하나와 소죽 끓이는 솥에 계란 하나 삶아 드리면 흐뭇하신 모습으로 잡수시던 아버지, 저는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고 싶었습니다.
공부하기 싫을 때도 성적표 받아보실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했고, 공주에서 학교 다닐 때는 다른 하숙생들보다 제일 먼저 일어나 매일 아침 저만이 아는 집 모퉁이에 가서 하늘을 보고 빌었습니다. ‘하느님, 신령님, 돌아가신 엄니, 우리 아버지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시게 해달라고 -’ 그러나 저의 간절한 소망은 그만 고2 겨울 방학 때 무너졌습니다.
그 후로 아버지께서는 제 인생의 중요한 고비마다 제 꿈에 나타나시거나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저를 돌봐주신다는 것을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아버지, 엄니! 제가 평생을 두고 하는 제 기도 들으세요? 아침마다, 제가 외국에 가거나 못하면 석환이나 동환이 아니면 석환에미가 서재에 모셔둔 아버지 엄니 사진에 청수 한 그릇, 향 하나 피우면서 하는 저희 말씀 들으세요? 저는 아마 평생을 간절히 기원하고 조심스럽게 살도록 태어났나 봅니다. 저희 형제들은 아버지 엄니의 보이지 않는 손이 저희들을 보살피고 계시다는 것을 늘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