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황혼기인 노년에도 예찬할만한 아름다움이 있을까. 저승꽃이 피고 총기가 사라진 호호야에게 매력이 있을까.
그런대 아이러니컬하게도 여명에는 가슴 설렘이 있으나 낙조의 처염한 아름다움은 해질녘에만 보인다.
아름다운 단풍은 나무가 한 해를 마감하는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그 극치미를 나타낸다.
전장의 장수는 어떠한가. 그들은 전장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칠 때 비로소 영웅호걸의 본색을 드러낸다.
한데 잎이 다 떨어진 낙목落木 같은 호호야에게서 아름다움은 어떻게 꽃필 수 있을까. 채근담의 「수성修省편」에 이런 글이 있다.
‘하루 해가 저물었으되 오히려 노을이 아름답고, 한 해가 장차 저문다 해도 귤 향기가 더욱 향기롭다. 이러므로 일생의 말로인 만년은 사람이 마땅히 정신을 다시 백배百倍할 때이다.’
해가 진 뒤에 그늘의 아름다움이 해가 떠 있을 때보다 더 짙고 서늘하며, 잎이 진 뒤 귤의 향기로움이 잎이 지기 전 영글고 있을 때보다 더 향기로우니, 사람이 늙어 말년에 이르면 아름다움이나 향기로움이 다 사라졌다 실망할 게 아니라 오히려 전보다 훨씬 더 정신을 아름답고 향기롭게 하라는 것이다.
흔히들 사람이 늙으면 아름다움이나 향기가 사라진다고 한다. 안광은 그 강렬한 빛이 죽고 행동은 굼뜨고 탄력이 떨어진 몸에서는 역한 노인 체취가 풍긴다.
실인즉슨 호호야세대에 대한 세상의 시각은 사실 그리 밝거나 긍정적이지 못한 편이다.
요새도 과거처럼 호호야세대더러 예사로 ‘상실세대’라고 한다. 창조나 생산 대신에 쇠락하고 소유한 것 모두를 야금야금 잃어버리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혹은 ‘부담스러운 애물단지’라고도 한다. 국가건 자식이건 경제능력이 없는 노인들을 먹여 살려야할 대상으로 치부해 부담스러워 하는 것이다.
호호야가 귀감이 되는 어른이고 영광스러운 훈장을 찬 퇴역 전사가 아니라 가정이고 국가에 짐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호호야를 짐스러워하는 저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별다른 세계에 산다는 건가, 저들 역시 속진의 때를 묻혀가며 나이를 먹고 있는 미래의 호호야들이다. 머잖아 저들도 황혼열차를 탈 것이다. 그러므로 저들도 겸허하고 조심스럽게 호호야들 세계를 주시하면서 어떻게 늙어야 아름다운 노년의 삶이 될까 깨달아야 한다.
늙은 티나 노추함을 보이지 않는 건 전적으로 마음먹기와 노력에 달려 있다. 곱게 늙자 결심하고 호호야답게 사는 것이다. 노년의 아름다운 삶을 위해서는 호호야의 눈에 핏발이 서서는 안 되며 입에서는 탓하는 볼멘소리와 한숨짓는 소리가 나와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호호야가 평화로워야 가정이 편하고 사회가 안정되기 때문이다. 호호야의 불만이 높아질수록 세상은 어지러워진다.
호호야의 한숨짓는 소리가 잦을수록 세상은 불안해진다.
노년이 아름다우려면 호호야의 모든 것, 보는 눈, 말하는 입, 생각하는 마음, 남을 대하는 행동 등이 부드러워야 한다. 그 부드러움은 마음속에 고여 있는 인자함이나 은근한 인정에서 이는 남실바람 같은 미풍이다. 그것은 관대함과 여유로움과 호의를 품고 있어 젊은 성급함을 누그러뜨리고, 상처 입은 고통을 어루만지며, 방황하는 발길을 멈추게 하며, 도전으로 일관된 삶에 잠시 멈춰 휴식이 필요하다는 타협을 일깨워주며, 호호야에게서 빛나는 지혜가 자신을 돌아보게 토닥인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며,
종국에는 자신도 저 부드러운 호호야처럼 늙을 수 있을까 희망적 과제를 품게 만든다.
호호야의 부드러움이 젊은이들 가슴에 잠시나마 아름다운 무지개로 선 것이다.
만일 호호야의 눈에 핏발이 서고 입에서 불만과 원망과 한숨이 쏟아져 나온다면 그 가슴엔 미움과 부정적 수렁이 패여 악취가 진동할 것이며 영혼을 질식시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