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연기인생 62년을 맞은 배우 이순재(83). 그가 출연한 작품은 일일이 헤아리기도 어렵다.
영화와 드라마만 각각 100편이 넘는다.
최근 영화 ‘덕구’ 시사회장에서 만난 이순재는 “별의별 종류의 영화에 다 출연해봤다. 주연도, 단역도, 악역도, 멜로연기도 다 해봤다”면서 “배우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무조건 작품 그 자체”라고 강조했다.
이순재는 5일 개봉하는 ‘덕구’(방수인 감독)에서 어린 손주 두 명을 홀로 키우는 ‘덕구 할배’역을 맡았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그는 세상에 남겨질 손주들을 위해 특별한 이별 선물을 준비한다.
이순재는 ‘덕구’에 노개런티로 출연했다. “요즘은 더러 돈을 따지기도 하지만, 옛날에는 돈을 받아봤자 얼마 안 되니까 작품 욕심이 우선이었죠. ‘덕구’도 처음 시나리오를 접했을 때 ‘아, 이건 참 소박하면서 진솔한 영화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이어 “제가 모처럼 영화의 90% 담당하는 작품이었다”면서 “쉽지 않은 기회여서 두말없이 하겠다고 했다”며 웃었다.
그의 말대로 이순재는 두 아역배우와 함께 극을 오롯이 책임진다. 마치 이웃집 할아버지를 보는 듯 자연스럽게 영화 속에 스며드는 이순재를 보고 있노라면 ‘연기장인’이라는 수식어가 저절로 떠오른다.
평소 쓴소리 잘하기를 유명한 이순재는 요즘 한국영화에 대한 생각도 털어놨다. “사실 요새 작품들은 앞뒤가 안 맞거나 너무 작위적인 영화들이 많아요. 또 사랑이 많이 결핍돼 있죠. 드라마를 봐도 그렇고, 사랑보다는 갈등이 더 우선이죠. 그런 면에서 ‘덕구’는 오랜만에 정감있는 영화입니다.”
그는 함께 출연한 손자 덕구역의 정지훈과 덕희역의 박지윤, 두 아역배우에 대해서도 극찬했다. 그러면서 기억을 더듬어 중견 배우들까지 줄줄이 소환했다.
“옛날에 저도 아역배우들과 많이 연기해봤어요. 안성기 씨가 중학교 1학년 때 저랑 연극을 같이 해봤고, 송승환도 어렸을 때 제가 데리고 했죠. 이승현은 5살 때, 윤유선은 8살 때 같이 작품을 했습니다. 그때 다 똑똑하고 잘했는데, 요즘 아이들 같지는 않았어요. 이번에 ‘덕구’ 아역들은 소화하기 어려운 역할인데, 본인이 작품과 역할을 충분히 이해하고 표현했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요즘 아이들, 경이롭습니다.”
이순재는 “저는 뭐 특별히 연기한 게 없다”며 “이 작품이 제시한 대로 그 줄기와 정서만 따라갔을 뿐”이라며 자신은 낮췄다.
이순재는 우리나라 배우 중 최고령에 속하지만, 젊은 배우 못지않은 ‘강철 체력’을 과시한다. 이번 영화에서도 인도네시아 현지 로케 등 체력이 꽤나 필요한 장면이 있다.
“체력을 유지하는 몇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저는 젊어서부터 술을 일절 안 해요. 예전에는 연극 끝나고 우는 게 일이였습니다. 일종의 허탈과 울분의 울음이죠. 그런 상태에서 술을 먹다 보니 술 취하고, 반 중독이 되어서 말년으로 갈수록 건강이 나빠져서 아까운 친구들이 육십도 되기 전에 먼저 갔습니다. 저는 1982년도에 KBS 대하드라마 ‘풍운’의 대원군 역을 하려 담배도 끊었습니다. 또 제가 모계 체질을 타고난 거 같습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96세에 돌아가셨는데, 넘어지지만 않으셨으면 아마 100세까지 사셨을 겁니다. 또 하나 중요한 요인은 제가 계속해서 할 일이 있었다는 겁니다. 과제가 있어 쫓아다니다 보니 드러누울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 체력을 유지하는 조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