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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와 진보는 별종인가

夏·林·散·策-박하림(수필가, 전 (주) 휴비츠 고문)
 

박하림 전(주)휴비츠고문
호호야들에게도 보수와 진보 간의 갈등과 다툼은 관심사인 것 같다. 그런데 호호야들에게는 오래 동안 고착돼 온 잘못된 인식이 있다. 

노년층은 예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보수주의 지지자로 우파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스러운 대립개념에서 젊은 세대는 진보 층이 되었고 두 성향이 거리의 시위대열에 물들면서 어느 사이엔가 보수는 민주주의, 진보는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 신봉자로 치부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시위가 격해지면 마치 그런 사상적 검증이라도 받아 확고한 신념이라도 정립해 있듯이 노인층을 향해서는 쉰내 나는 우파 보수꼴통이라 비아냥대고 젊은 층을 향해서는 철딱서니 좌파 종북주의자라고 이념적 색깔론으로 비화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사상적으로 과연 노년층은 민주주의 신봉자이고 젊은 층은 공사주의 추종자란 이분법이 맞는다는 의미인지 모르겠다. 그러한 이분법적인 인식에는 불합리한 무리가 있다. 보수와 진보가 마치 별종인양 거창하게 일삼는 도론(徒論)을 보노라면 우습다 못해 한심해 눈살이 다 찌푸려진다. 

 보수와 진보에 대한 논쟁의 폐단은 그것들에게 제멋대로 알쏭달쏭 이념의 옷을 입히는 데서 연유한다. 보수이니 진보이니 하는 건 변화에 대한 태도이지 이념이 아닌데 말이다. 때문에 ‘보수적’이다거나 ‘진보적’이라고 해야 옳지 ‘수구꼴통보수’니 ‘진보좌파’이니 식으로 이념적 정형의 옷을 입히는 것은 잘못된 인식의 소치다. 그건 어디까지나 사고와 신념의 성향의 문제이지 사상적 신념이나 주의가 아닌 것이다. 그 가치를 보편적으로 보수는 자유주의와 자유 시장경제주의에서 찾아 신봉하고, 진보는 평등주의와 진취적인 개혁을 통해 그 최고 가치를 지향한다. 그렇다고 보수적인 사람이 평등주의를 지향하지 않는 게 아니며 또한 진보적인 사람이 자유 시장경제주의를 선호하지 않는 게 아니다. 따라서 보수와 진보의 선호는 철학과 가치관에 따라 어느 한 쪽이 기초가 되기도 하고 더 우세하기도 하며 조화롭게 융합되기도 하는 것이다. 

 보수와 진보가 편을 가르고 마치 자기 것이 더 정의롭고 더 가치 있는 것처럼 주장하고 폄하하며 부정하는 것은 무지한 탓이다.

 보수적 가치를 온고지신溫故知新하지 않는 진보가 무가치한 것처럼 진보적이지 못한 보수 또한 그러한 것이다. 현명한 진보는 보수적 가치를 활용할 줄 알며 신중한 보수는 진보적 참신성과 과감한 혁신의 대의를 이용한다. 이념적 대립각을 세워 배타적으로 보수와 진보의 진영을 세우는 것은 어리석은 대립이다.

서로 시비할 것은 그 폐단일 뿐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진보의 머리띠를 두르면 으레 폭력적이며 비생산적인 좌파의 투쟁으로 간주하고 그 세상에서라면 굶주리고 자유를 박탈당한 삶을 살 것이라고 마치 지상의 지옥처럼 단정하는가.

 그런가하면 진보진영의 논리 역시 전부가 같아서 보수정권이란 자본가의 시녀로 정경유착으로 부패하기 보통이며 민주정의 구현은 구두선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정치행태나 사회시스템이나 가치관이 보수성향인지 진보적 성향인지 여부와 그 가치의 비교를 하지 않고 사상적으로 재단하는데 있다.

도시 보수성향인 사람이 발전적 진보를 마다할 리가 만무하며, 진보성향자가 보수적 가치를 접목함으로써 시너지효과를 도모함이 너무나 당연하다. 

도론 자들이여 보수와 진보한테 그럴듯한 알록달록 이념의 옷을 입혀 호호야들을 헛갈리게 하지 말 것이다. 그리고 호호야들이여 보수든 진보든 성향은 자유이니 지향하는 가치가 뭔지 얼마나 국민의 행복한 삶에 기여하는지에 입각해 그 편에 서면 될 것이다. 국민이 굶주리는 터에 민주고 진보고 그 가치를 논하는 건 무의미할 뿐이다.

모든 사상의 최고가치가 인간의 행복한 삶을 지향하는데 있음은 불변의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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