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 태어나서 행복합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보답할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가왕’ 조용필(68)의 데뷔 50주년 소회에서는 진심 어린 고마움이 묻어났다.
11일 오후 2시 서울 용산구 한남동 블루스퀘어 아이마켓홀에서 데뷔 50주년 기자간담회를 연 그는 “제가 50년간 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큰 행운”이라면서 “그저 좋아서 음악을 했는데, (‘가왕’, ‘국민 가수’, ‘20세기 최고의 가수’란) 별의별 호칭을 붙여주셔서 제겐 부담이었다”고 웃음 지었다.
조용필의 기자회견은 지난 2013년 신드롬을 일으킨 19집 ‘헬로’ 발매 쇼케이스 이후 5년 만이다. 음악평론가 임진모 씨가 진행을 맡았다.
“오늘 얘기하자면 밤을 새워도 다 못할 겁니다. 왜냐하면 제가 나이가 아주 많기 때문에 그만한 인생의 경험이 많을 테니까요.”
1968년 록그룹 애트킨즈로 데뷔한 조용필은 김트리오, 조용필과그림자 등의 밴드를 거쳐 솔로로 나섰다. 19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히트한 것을 시작으로 1980년 ‘창밖의 여자’’단발머리’ 등이 수록된 1집으로 국내 첫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며 우리 시대 스타 탄생의 서막을 알렸다.
그는 “5~6살 때 시골 농촌에서 어떤 분이 부는 하모니카를 통해 처음 음악에 대한 느낌을 받았다”며 “‘푸른 하늘 은하수~’라고 동요를 하모니카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 음악과 첫 인연이었다. 이후 축음기로 가요를 접했고 라디오로 팝을 알게 됐고 서울에 왔을 때 형이 치던 통기타가 있어서 기타를 치게 됐고 그것이 죽 연결됐다”고 회상했다.
이어 “미8군에 잠깐 엑스트라로 나오라고 해서 1968년 12월에 기타를 친 적이 있다. 그것에 큰 매력을 느껴서 음악을 해야겠다 싶었다. 다른 비결은 없다. 하다 보니 새로운 걸 계속 발견하고 그때 충격을 계속 받았다. 지금도 저는 계속 배우고 있다. 아마 죽을 까지 배우다가 끝날 것 같다”고 덧붙였다.
여전히 배움의 길이라고 했지만 그는 50년간 19집(10집이 파트.1과 파트.2로 구성)까지 총 20장의 앨범을 내며 수많은 최초, 최고 기록을 세웠다.
국내 최초 단일 앨범 100만장 돌파, 최초 누적 앨범 1천만장 돌파, 일본 내 한국 가수 최초 단일 앨범 100만장 돌파, 한국 가수 최초 미국 뉴욕 라디오시티 공연, 대중가요 최초 ‘친구여’ 교과서 수록, KBS ‘가요 톱텐’ 통산 69주 1위 등 그의 기록은 셀 수가 없다.
컬러TV 시대가 도래한 1980년대에 ‘오빠 부대’를 거느린 그는 수많은 명곡을 낳으며 팝에 뒤처졌던 가요의 위상을 높이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록을 기반으로 팝발라드, 포크, 디스코, 펑크, 트로트, 민요, 동요까지 국내 가수 중 가장 많은 장르를 시도했다.
가장 애착이 가는 앨범을 묻자 그는 “대부분 정성들여 만들어 정말 말하기 어렵다”면서도 “곡으로 따지자면 13집의 ‘꿈’이다. 이 곡은 12집의 ‘추억 속의 재회’와 함께 만들었는데 어떤 걸 낼까 하다가 ‘꿈’이 더 좋다고 해서 반대로 ‘추억 속의 재회’를 먼저 냈다. ‘꿈’은 1989년에 녹음하고 1991년에 냈다”고 소개했다.
“‘꿈’이란 노래는 제가 비행기 안에서 만들었어요. 요즘도 연습할 때 가장 먼저 부르죠. 목소리 푸는 곡으로요. 멜로디 라인이 어렵지 않잖아요. 이 곡과 ‘단발머리’가 목 풀기에 좋아요.”
특히 그의 음악의 강점은 시대와의 교감이었다. 그는 63세의 나이에 19집의 ‘헬로’와 ‘바운스’를 히트시키면서 혁신적인 사운드로 ‘신구 세대 통합’이란 문화 현상도 만들어냈다.
그는 젊은 세대가 열광했다는 말에 “‘바운스’를 통해 몰랐던 사람들이 알 수 있었지, 열광은 아니다”고 웃으며 “‘나이가 들어가는데 내가 음악을 계속할 수 있으려면’ 하고 고민하다가 ‘젊은이들이 나를 기억한다면, 그들이 60~70세가 될 때까지 나를 더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젊은 감각을 유지하는 비결로 유튜브 등을 통해 요즘 음악과 공연을 꾸준히 듣고 보는 것을 꼽았다.
“음악을 매일 들어요. 유튜브를 클릭하면 최근 콘서트들이 죽 나오죠. 많이 보고 많이 들어요. 요즘 라틴 음악이 대세여서 접하고, 가끔 스크립트 음악도 듣고, 요즘은 호주의 시아 앨범도 전체를 다 들어요. 특히 제가 보는 것은 코드나 화음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이런 부분이죠.”
그러면서 그는 스스로 ‘꼰대’ 세대가 된 것을 유연하게 받아들인다면서 “제가 지금 꼰대 소리를 듣고 있다”고도 했다.
“꼰대는 누구에게나 당연히 오는 것이잖아요. 그걸 거부하는 것은 아니에요. 전 일부러 ‘내일모레면 내가 70이야’라고 말합니다. 이 정도로 나이 많아도 열심히 하고 있어, 음악 좋아하고 있어라고요.”
“20집이 올해는 못 나올 것 같아요. 지금껏 (싱글) 음원을 낸 적이 없는데, 혹 음원을 낼 수도 있지만요. 6월에 봄 투어 끝나고 2개월 반 쉬는데 그때 또 준비해야 할 것 같아요. 사람들은 인생에 관한 음악을 발표하라는데, 전 속으로 ‘웃기고 있네’라고 생각해요. 음악은 음악이지, 그 자체가 세월이 지나면 역사니까요. 전 조금 다른 생각을 해요. 지금 하는 것은 미디움 템포에서 조금 빠른 곡이죠. 요즘 사운드가 EDM인데 전 앨런 워커 같은 프로듀서가 제 취향에 맞아요.”
심심한 일상이지만 공연이 있을 때면 6~7개월 전부터 준비로 바쁘게 돌아간다는 그는 5월 12일 서울 올림픽주경기장에서 ‘땡스 투 유’(Thanks to you)란 타이틀로 기념 투어의 막을 올린다. 그가 주경기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여는 것은 이번이 7번째다.
가장 행복한 순간을 묻는 질문에도 “가수면 다 똑같을 것”이라며 “공연에서 관객이 만족하는 모습을 보면 더 이상 뭐가 없다, 제일 행복하다”고 강조했다.
그러기 위해선 연습을 통해 목소리를 유지하고 관리하는데 힘쓴다고 말했다.
“제일 나이 먹으면 안되는 부분이죠. 노래 연습을 하다 보면 어느 부분이 가장 취약한지 알 수 있어요. 나이가 들면 중저음이 떨어지는데, 사무실 위 스튜디오에서 중저음만 골라 집중적으로 연습해요. 호흡과 배의 힘 등을 스스로 느껴야 하거든요.”
시간에 대한 압박감, 인간으로서의 가장 두려운 것은 무엇인지 묻자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씀, 맞습니다”라고 수긍했다. 19집 인터뷰 때 그는 “내게는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 폭탄을 들고 뛰어들어야 한다. 벽이 깨지든 내가 깨지든”이라고 언급했다.
“저는 폐 끼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런데 ‘평생을 저 사람 노래를 들으며 살았는데 그만두면 난 뭐야’란 생각을 할까봐 이게 가장 두렵습니다. 저는 노래가 안되는데 좋아해준 분들이 실망할까봐…. 제가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지막 공연을 봤는데, 전 저렇게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팬 입장에선 제가 그만두면 배신당하는 느낌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허락되는 날까진 해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