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오지심(羞惡之心), 그건 자기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것으로 바로 인간과 동물이 분명하게 다른 점이다. 맹자는 그것을 의義의 시초요 실마리라 했다. 인간에게 그게 없으면 짐승이나 다름없다할 것이다.
우선 수오지심의 발단은 자신의 그릇됨을 성찰하고 부끄러워하는데 있다.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하거나 숨기고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것은 모순이며 불의다. 그런 자기성찰과 반성 없이 남의 옳지 못함을 매도하는 것은 위선이다.
자신을 성찰하는 데는 도덕성과 용기가 필요하다. 양심의 소리가 울려야 자신의 그릇됨을 알아볼 수 있으며, 용기가 있어야 그 소리를 듣고 시인한다. 그런 말에 귀가 절벽이고 불의함을 언제 한 번을 질정하지 못하는 심약함으로는 자성이 불가능하다.
자신의 그릇됨을 알고 자인하여 고치고자 용기를 내는 것은 선린의 의무를 다 하는 것이며 정의로운 사회 구현에 참여하려는 결의다. 그가 가려는 길은 반듯한 인문도정의 길이므로 그는 항상 따듯하고 모범적인 이웃으로 존경을 받는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옳지 못하므로 남의 옳지 못함에 무심하고 방관하는 이웃일 뿐이다. 그런 이들은 십중팔구 이기주의자들로 공존공영정신이 박약하고 부정부패에 약하다.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지 않는 것은 이해도 관용도 아니다. 민주사회의 적 중 하나가 무지 때문이든 공모자로든 남의 잘못을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방치하거나 동조 하여 조장하는 것이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 인간사회의 법과 규범, 도의와 염치를 헌신짝처럼 여기는 것은 그 사회를 부패시키고 파괴하는 것과 같다. 자신의 그릇됨을 알고 부끄러워하는 것만큼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해야 한다.
수오지심은 자기성찰과 남의 불의를 배척하는 양 날개를 가지고 있어 어느 한 쪽이 없으면 그 발휘가 완전할 수가 없다. 전자의 날개는 내적인 노력이고 후자의 날개는 외적인 행동으로 전자에 치우치면 독자수행에만 이로울 뿐이며, 후자와 조화롭게 실천돼야 그 수오자심의 가치가 구현된다.
세상에 인간답지 못한 이들이 쌔고 쌘 것은 동물한테 없는 수치심이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더러 개만도 못한 인간 같으니라고 하면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음은 물론 개한테 배워야한다는 참으로 지독한 모욕을 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엔 그런 모욕에도 끄떡도 하지 않는 망종들이 너무나 많다. 그런 망종들의 공통된 특징이 철면피함인데 도무지 자성할 줄을 모르는 데서 연유한다. 세상에 뻔뻔한 이웃만큼 더불어 살기 피곤한 존재도 없다.
자기성찰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란다는 식으로 남을
흉본다는 것은 진정한 수오지심일 수가 없다. 당당하게 남의 불의를 미워하고 단죄할 만큼 자시성찰을 철저하게 하고, 일단 불의의 편에 서지 않기로 작심하면 설사 자신에게 불리하더라도 처음 결정을 고수해 견지해야 수오지심이 빛난다. 수오지심이 자성과 불의의 배척이라는 양 날개를 가지고 있음은 합리적이다.
지금 우리사회에 수치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덩달이들이 휘젓고 다니며 꼴사납게 콩이야 팥이야 따지고 얄팍한 지식과 철학 가지고 감 놔라 배 놔라 말 난장을 쳐대는 게 고통이고 문제다. 저런 덩달이들한테 그나마 약이 될 매는 수오지심의 질정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