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이 섰다. 사람들이 떼로 모였다. 인파를 헤집고 들어가면 소 수십 마리가 서로 몸을 부딪치며 낮고 긴 울음을 울고 있다.
원로작가 황영수(77)가 2015년 그린 소시장 풍경이다. 가로·세로 2m 캔버스를 채운 풍경은 정겹고 뜯어보는 재미가 있다. 작가는 1941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지만, 난리 통에 옮겨온 광주를 평생 터전으로 삼고 살아왔다. 고향과 가족을 주제로 한 작품 상당수가 그때 기억에서 출발한다.
특히 소는 황영성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우리 자랄 때는 소가 사람이랑 한집에서 살았어요. 외양간이 붙어 있으니깐. 우리와 삶을 같이 한 짐승은 소 뿐이야. 한국 사람들이 소에게 특별한 마음을 품는 것은 당연하죠.”
지난달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사간동 현대화랑에서 만난 작가는 “소 이야기는 곧 제 이야기”라고 말했다. 현대화랑에서 8년 만에 여는 개인전 ‘소의 침묵’은 1980년대 후반부터 근래까지 작업 30여 점을 소개하는 자리다.
전시 제목과 같은 ‘소의 침묵’ 연작은 검은 소 작업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선과 면으로 단순화하는 조형적 변화도 두드러진다. 작가는 50여 년 화업을 뒤돌아보며 “어느 순간 검은 소를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 설명했다.
"검정이라는 건 모든 색채가 다 합쳐진 것이잖아요. 모든 욕망이나 비밀, 숨겨왔던 것들이 이 검은 색에 다 들어가 있다고 보면 돼요. 나이 여든이 되고 보니 인생에서나 작업에서나 못다 한 이야기, 표현들이 많아요.”
작가가 최근 새롭게 시도한 ‘문자-형상’연작도 흥미롭다. 이태백, 조조, 김소월, 이용악, 정지용 시를 빌려와 문자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들이다. 격자 네모 안에 사람과 동물을 형형색색으로 그린 대표작 ‘가족 이야기’도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