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기치 않게 여러 사람한테서 어쩜 이렇게 곱게 늙으셨느냐는 얘기를 심심찮게 듣게 되었다.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아도 잘 모르겠는데, 수 년 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을 많이 하였는가!
가슴이 다 타서 숯검정이 되잖은 것만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하고 남몰래 탄식을 한 적이 그 얼마였던가. 부모님 덕에 좋은 인상을 타고난 것이 홍복인 것 같아서 늘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이다.
얼마 전 세미나 장소에서 친한 시인이 내게 한 스님을 소개 시켜 주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개종을 하여 현재 내가 처한 종교문제의 고민스러운 얘기며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 스님은 마지막으로 내게 던진 말씀이 지금 나의 모습이 바로 보살의 형상이니 그 모습 잃지 말고 자아를 성찰하는 것으로 공부를 삼고 죽을 때 까지 그 모습으로 살라며, 언제든 시간을 내서 절에 한 번 오라고 했다.
생전 처음 본 스님이 내게 던진 말 한마디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고운 얼굴로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그저 매사에 오로지 긍정적인 생각밖에 한 것이 없는데….
아무리 고달파도 힘들어도 그저 잘 웃는 것이 특기라고나 할까. 아니 슬프면 슬프다하고 아프면 아프다하고 기쁘면 기쁘다하며 솔직하게 표현한 것 외에는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남편의 중병간호(C형간염으로 15년 투병 끝에 간암)로 초죽음이 다 되어버려 눈물마를 날이 없었던 그해 어느 날이었다.
의사 지시에 따라 요양병원 주위를 산책시키는 동안 몰래 우는 나를 본 남편이, 그렇게 울고도 아직 눈물이 남아 있어? 라고 책망하는 바람에 나는 화들짝 놀라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다 알았다는 듯이, “내가 죽더라도 절대로 울지 말아! 자네는 정말 곱게 늙었어.” 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내 몫까지 자식들과 마음 편히 살라고 하던 그 측은지심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저며 온다.
108호실의 다섯 명의 말기 암환자들의 보호자 아닌 보호자가 되어서 그렇게도 힘들게 겪어내었던 그 병실에서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남편과 나와 환자들과 죽음도 삶도 부정하지 않고 그저 그날그날에 최선을 다 했고 부정적인 생각 같은 것은 아예 접고 살았다. (요양병원으로 마지막 단계에 보내진 환자들이라 보호자는 거의 오지도 않았다. 그저 병원에 맡겨져 있을 뿐 보호자는 오직 나 하나 뿐.)
영화배우 재클린 비셋은 인터뷰에서 “나이 든 여자를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 다스리기”이다.
자신의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야 표정 역시 그윽하고 부드럽게 만들어져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진다. 젊은 시절에는 그저 용모로 평가되지만 나이든 여자는 폭 넓은 경험, 이해심, 포용력 등 스스로를 어떻게 길들이고 주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에 따라 아름다운 여자, 혹은 심술궂은 여자로 평가되지요." 라고 했단다.
평생을 욕심 없이 남에게 베풀고 살아오신 것을 보고 자란 우리 형제들은 그저 긴 세월 동안 서로 다투거나 싸워 본 적이 별로 없으며, 다 그만그만하게 살면서도 누구 하나 의지하거나 기댄 적 없지만, 어려운 일이나 기쁜 일이 있으면 합심하여 움직이는 것이 아마도 곱게 늙는 비결이 아닌가 한다.
곱게 늙어 간다는 것은 아마도 어떠한 경우에도 긍정적인 생각과 남에게도 자신의 따스한 손을 내밀어 잡아 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닐는지... .
인생살이 쳐놓고 고단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며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마는, 아마도 수많은 삶의 얼굴 중에 밝고 따스한 면을 가려서 볼 줄 아는 지혜를 얻어서일 게다. 그래야만 얼굴의 주름도 고단한 삶의 표식이 아니라 오랜 세월 공들여 만든 우아한 작품처럼 보일 테니까.
아름다운 삶이란 아마도 많은 부분 긍정적으로 포용(包容)하면서 채우기 보다는 비우고 사는 것을 생활화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닐까. 세상에서 가장 좋은 종교는 친절이라고 한 법정스님의 말씀을 되뇌어 보며, 새삼스럽게 곱게 늙는 비결을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