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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기일에 쓰는 어머님 전상서

어머니~

해마다 봄비 흠뻑 내려 진달래와 철쭉이 온 산하에 물들면 어머니 가신 날이 가까워 오는 줄 알게 됩니다. 봄이 오고 또 가더니 어머니를 보내드린 지 벌써 어언 24년이 되었네요, 눈길에 넘어져 팔을 다치신 후 병이 깊어지셨지요. 워낙 강하신 분이라 몇 주 지나면 툭툭 털고 일어나실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길로 병이 깊어져서 오랜 세월 고생만 하시다 저희 곁을 떠나셨습니다.

어머니~

고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가 제게 편지를 써 보내신 것 기억이 나세요?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오늘은 제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늦게나마 답장을 올려 드립니다.

어머니~ 이렇게 부르기만 해도 애잔한 것이 가슴을 저며 오는데 왜 그때는 어머니와 살뜰하게 대화 한번 나누지 못했을까요? 가난한 살림살이에 평생 일만하신 탓에 8남매 중 여섯째인 저는 어머니랑 손잡고 어디 한번 놀러 한 번 가본 기억도 없습니다. 

또한 제가 뒤늦게 철이 들고서는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는 핑계로 어머니와 추억 될 만한 여행 한 번을 못한 것이 너무 아쉽습니다. 어느 여름날 아프신 어머니지만 그래도 어머니를 모시고 동해로 휴가를 떠나려고 했었는데 그것도 무산되었죠. 전날 침대에서 내려오시다 낙상하여 일어서질 못하시어 그 길로 큰 병원에 입원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돌이켜 보면 어머니와의 이생의 인연이 어찌 이리도 초라한지요?

어머니~

한 번은 제가 1등을 하면 다른 집 아이들이 먹는 오징어 무국을 꼭 끓여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지요. 그런데 어머니는 약속을 못 지키셨어요. 그것이 미안하셨는지 한 번은 내 손을 꼭 잡으시며 이렇게 말씀해 주셨죠. “네가 공부만 열심히 하면 서울서 공부도 할 수도 있고 외국으로 유학도 갈 수 있단다. 그래서 훌륭한 사람이 되면 오징어 무국보다 더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어. 그러니 계속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저는 그 말을 믿었는데 어머니는 그 시절에 유학이라는 게 있는 줄 어떻게 아셨나요?

제가 인문계 고등학교를 포기하고 모든 걸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지방의 공고로 가게 됐었죠. 아직은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저를 타지로 보낸 것이 못내 안쓰러우셨는지 몇 개월 뒤에 제게 손수 편지를 써 보내 주셨지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받아보지 못한 어머니 편지에는 꾹꾹 눌러 써 있었습니다. 건강히 잘 지내는지, 밥은 잘 챙겨 먹는지 물으시고 힘들어도 잘 견디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당부 하셨지요. 저는 어머님의 간절한 바람과 기도 덕분에 47세의 나이로 영국으로 유학을 가고 11년 만에 박사도 되었습니다. 

작년 이맘 때 부모님의 산소를 이장하면서 20여년이 넘어 어머니를 다시 뵈었지요. 그러나 아버지 어머니 모두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그때의 아픈 저의 마음을 편지로 쓰려고 했지만 그러질 못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고 중학교 때는 성남시로 강제이주를 하게 되면서 시골 고향에서보다 더욱 모진 고생을 하신 우리 어머니! 어머니 아프실 때 저랑 같이 부르던 찬송을 어머니가 그리울 때마다 저 혼자 부르곤 한답니다. 

소원하시던 대로 따뜻하고 꽃피는 계절에 하늘나라로 떠나신 우리 어머니~

며칠 뒤에는 형제들과 함께 어머니를 뵈러 가려합니다.  그 때 어머니께 찬송도 불러드리고 이 편지도 올리렵니다. 

그 때까지 편히 계십시오. 

보고 싶은 어머니!

 

이재섭은 1957년 충남 보령 출생. 사회정책학 박사 (영국 University of Kent). 30년간 공적연금을 연구하고 운영한 공적연금전문가. 공무원연금연구소장과 성균관대학교 겸임교수 역임. 은퇴연금 및 미래설계 강사, 시인이자 하모니스트. 시집 ‘석탄’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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