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한 노후를 보내고 싶지 않은 호호야는 없으리라. 해서 어떤 고승은 마음을 비우라했고, 어떤 명현名賢은 방하착放下着 하라 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당신께 오라고 하셨다. 성현의 가르침도 그러해서 안분지족安分知足하여 살라고 가르쳤다.
저런 가르침으로 미루어보아서라도 노후의 평안을 위해서는 분명히 가지고 있는 뭔가 무거운 것, 분수에 넘치는 것, 미련과 집착으로 부여안고 있는 것들을 버려야하는 건 사실인 것 같다.
그렇다면 대체 무얼 버려야 하는가. 불교 경전의 교훈집인 법구경法句經은 분노품忿怒品에서 평안한 노후를 위해 버려야 할 것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성냄, 거만함, 애욕, 탐심, 집착 같은 것으로 그런 것들을 버리면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해 괴로움이 없어진다고 했다. 불자의 이상인 견성의 경지, 즉 부처가 되라는 것이다.
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어 중후해졌다 해도 차마 눈 뜨고 보기 역겹고 울화통 터지는 세상사에 성내지 않는다는 건 지난하다. 호호야가 거만 떨 일이 별로 없을 것이니 겸손 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애욕이라면 호호야에게 고민거리가 아닐 것이다. 탐심의 경우 호호야는 자유롭지 못하다. 식탐서부터 술, 명성, 재미, 돈에 까지 턱없는 탐심을 품거나 탐착하는 호호야들이 이외로 많다. 집착 또한 마찬가지로 호호야의 아킬레스의 건이다. 자식의 효도, 소유한 것, 과거의 명성 등에 집착하는 것은 노후를 어지럽고 불편하게 만든다.
평안을 위해 성내고 해치려는 사람을 보더라도 너그럽게 용서하고 사랑으로 부드럽게 대하면 하늘이 복을 주고 사람들의 사랑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욕을 참아 분을 이기고, 착함으로 악을 이기고, 보시로 인색함을 이기고, 지성으로 거짓을 이기라 했다.
그 모든 게 다 행복한 노후를 위한 것으로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행복론≫에 의하면 사람은 매사 조금은 부족하고 모자란 상태에서 행복하게 된다고 했다.
다분히 중용지도에 기준 하는 행복론으로 그 내용은 이러하다. 조금 부족한 아쉬운 상태란 겸허한 마음으로 감사하는 상태를 말한다.
의식주 수준에서 조금 부족한 듯한 재산,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가 약간 부족한 용모, 겨루어서 한 사람에게 이기고 두 사람에게 질 정도의 체력, 자신이 자만하고 과시하고 싶은 수준을 그 절반 정도 밖에 알아주지 않는 명예와 명성, 그리고 자신의 연설을 듣고 청중이 절반만 박수를 칠 정도의 말솜씨를 소유했다면 행복한 것이라고 했다.
주자(朱子)의 중용(中庸)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용(庸)이 평상이라는 언제나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고, 균형을 유지하는 중(中)의 내용인즉 치우치지 않고(不偏) 어디에 의지하지 않으며(不倚)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無過不及) 것을 의미하므로 행복이란 약간 모자란 듯한 상태에서 소유하고 누리는 게 최상이라는 것이다.
호호야는 황천의 문턱에 선 형국이니 죽음의 비애와 공포와 함께 인생의 허망함을 절감하며 황혼열차에서 내릴 종착역을 향해 달려간다. 모자란 듯이라도 소유하고 누리며 살 수 있다면 그 아니 감사할 하늘의 축복이 아니랴, 지금 누리는 평안을 소중하게 여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