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겨울밤의 한 토막을 잘라 이불 속에서 마음의 등불을 켜고 명심보감의 효행 구절이며 갑자 을축의 육갑을 구술로 외우게 하셨던 엄한 선생님이시기도 하셨던 아버님!
돌이켜 보면 아버님 가신지 어언 55개성상이 지났고 공부를 한답시고 슬하를 떠난 것은 산천이 변한다는 시공을 더해야하는 긴 세월인 것 같습니다.
1960년대 초 제가 대학을 졸업은 했으나 취직을 할 수 없으니 군을 필해야 하는 장벽을 넘어야 하는 것이 당면 과제였습니다. 넘치는 경쟁 속에 어렵게 군 생활을 하게 되었지요. 채 제대로 자리를 잡기도 전에 아버님께서는 하늘나라로 가셨다는 관보를 받았습니다. 업무 인계가 순탄치 못 할까봐 휴가를 꺼리는 상사들의 우려로 논란 끝에 1주일간의 휴가를 얻어 귀가했을 때는 장례는 끝났고 삼우제에 참석하는 것으로 족해야 하였습니다.
임종은 고사하고 정례에도 참석 못한 불효를 어떻게 사죄 드려야 하는 것인지 백골난망이옵니다.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우리의 삶도 좋아졌습니다. 혼란과 무질서도 하면 된다는 의욕으로 기적 같이 잘 살자고 일어서는데 성공했습니다. 다만 아 쉬움이 있다면 효를 그렇게 강조하시던 아버님께 효도를 할 수 있는 기회조차 갖지 못한 불효를 돌덩이처럼 가슴에 안고 있습니다. 손녀 부자인 집안에 자나 깨나 손자 노래를 부르셨는데 손자는 보시지도 못 하시고 너무 빨리 가셨다고 안타까워하시던 어머님의 한숨 섞인 넋두리도 있었습니다. 슬하에 손녀 10명 손자 4명의 다복한 가정으로 작은 행복 속에 달콤하기도 하였습니다. 아버님께서도 함께하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모자람이 남는 때이기도 합니다.
호사다마라고나 할까요, 일봉 형의 작고와 은영이를 가슴에 묻는 아픔 도 있었습니다. 딸이라고 섭섭해서 서운이라고 이름 지었던 아이는 중견기업 사장의 사모님으로 우뚝 섰고 또 딸이라고 외면당했던 인희는 오뚝이처럼 일어서서 그 때를 얘기하며 화사하게 웃곤 합니다. 시대의 변천도 거들었지만 모두들 사회 각계각층에서 남자들과 나란히 보기 좋은 모습들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립고 보고 싶은 아버님!
죄송한 말씀이오나 옮겨가신 유택에 요즈음 상서롭지 못한 소란이 있었을 것입니다. 조금 불편하시더라도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그 또한 지나갈 것입니다. 참되게 살겠습니다. 바르게 살겠습니다. 사랑으로 살겠습니다.
우리 7남매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은혜 가능하다면 하늘나라에 가서라도 효도 드리겠습니다. 모두들 만날 수 있다면 형님 누나들에게 받은 사랑도 다시 나누고 싶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