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이명박 정부 시절 청와대에 특수활동비를 지원한 구체적인 경위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법정에서 증언하다 재판장에게 호된 질타를 받았다.
원 전 원장은 18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3부(이영훈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의 재판에 증인으로 나왔다.
김 전 기획관은 이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2008년과 2010년 두 차례에 걸쳐 국정원에서 총 4억원의 특활비를 받은 혐의로 기소됐다. 원 전 원장은 2010년 2억원을 청와대에 지원하게 한 당사자다.
원 전 원장은 2억원 지원 경위에 대해 “우리 직원이 ‘청와대에서 기념품 시계가 다 소진돼서 어려우니 그것 좀 도와달라는데 어떻게 할까요’라고 하길래 ‘도와줘라’라고 한 것 같다”며 “구체적인 금액도 명시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기념품이라는 것도 제가 기억한 건 아니고, 검찰 조사과정에서 검사가 기념품 얘길 꺼내길래 생각이 나서 ‘그런 적이 있는 것 같다’고 진술한 것”이라고 말했다.
원 전 원장은 돈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한 청와대 인물이 누구인지에 대해선 “기억이 안 난다”고 말했다. 그는 지원 요청자가 누구인지 확인 작업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 전 대통령에게서 지원 요청을 들은 게 아니냐는 질문에는 “대통령이 저한테 돈 얘기를 할 관계는 아니다”라고 정색하며 말했다.
그는 “상부 기관에서 어렵다고 하니까 ‘그럼 어쩔 수 없지 않나’ 생각한 것이지, 법적인 문제는 생각하지 않았다”고도 말했다.
이 같은 원 전 원장 얘기는 김 전 기획관의 주장과 엇갈린다.
김 전 기획관은 대통령 특활비로 호국 보훈단체에 격려금을 지원하다가 끊은 뒤 단체 측에서 항의가 들어오자 이 전 대통령에게 ‘국정원에 지원 요청하는 게 어떻겠냐’고 건의했다는 입장이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이 ‘알겠다’고 한 뒤 원 전 원장에게서 연락이 왔다고 김 전 기획관은 주장해왔다.
재판장은 원 전 원장이 사실관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으면서도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선 “기억이 안 난다”거나 “모른다”고 답하자, 직접 질문하면서 신빙성을 검증했다.
이 부장판사는 국정원 특활비 5000만원이 이명박 정부 ‘민간인 사찰’ 의혹을 폭로한 장진수 전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에게 전달된 상황에 대해서도 질문들을 던졌다.
원 전 원장은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그때 당시 전혀 몰랐다”고 주장했다.
재판장은 이에 “당시 ‘관봉 5000만원’에 대해 말이 많았고, 국정원 돈이냐를 두고 청와대도 전전긍긍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을 모를 수가 있느냐”라며 “모른다고 하는 건 말짱 거짓말”이라고 질타했다.
재판장은 2억원의 명목에 대해서도 “시계 말고 다른 건 기억나는 게 없느냐”고 캐물었지만 원 전 원장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재판장은 원 전 원장이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하자 “당연히 나올 수 있는 얘기를 어떻게 모른다고 하느냐. 증인의 얘기가 신빙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조창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