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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해빠진 사후약방문

夏·林·散·策- 박 하 림 수필가, 전 (주) 휴비츠 고문
우리나라처럼 사후약방문이 많은 나라가 또 있나 모르겠다. 우리가 버리지 못하고 있는 고질병에 지겹게도 반복되는 사후약방문이 있다. 그건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나 뒷북치기와 동기간이다. 일을 그르치고 나서야 잘못을 깨달아 후회하고 고친다는 의미다. 손해는 손해대로 보고 잃은 것을 보충하기 위해 또 돈을 들여 원상대로 복구해야 하니 이중삼중의 대가를 치르는 셈이다. 

 우리나라, 특히 정부나 관리들이나 지도자들이 사후약방문 짓는 데는 가히 달인지경이라는 건 비밀이 아니다. 걸핏하면 대형 사고를 치거나 큰 손해를 입는 실책을 저지르고는 온통 후회막급하다 요란을 떨며 잃어버린 소는 잊고 서둘러 외양간을 짓자 생난리를 친다. 어떤 뻔뻔한 입은 옛 교훈에도 패전이란 병가지상사라 했으니 실패가 곧 성공의 어머니임을 거울삼아 외양간을 더 튼튼하게 짓자고 설레발을 떤다. 한데, 사뭇 해연한 것은, 소를 잃은 잘못을 반성하는 소리는 잘 들리지 않으며 잘못을 사과하고 당당하게 응분의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더욱 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해서 이제는 여간한 대형사고가 아니면 철저한 원인과 책임소재 규명은 구렁이 담 넘어가는 식으로 입방아만 찧다가 유야무야되기 일쑤고, 마치 외양간 고치는 일이 최선의 사면의 길이라도 되듯이 설레발을 떨며 나선다. 예방관리에는 그렇게도 무딘 터에 사후약방문은 어찌도 번듯하게 강구해 내는지 갈수록 외양간 고치기 명수들이 늘어만 간다. 언제까지 사후약방문을 예사로 쓰고도 살아남을지 역사를 촌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역사에 치욕과 한을 뜸뜨듯이 새겨 쓴 비극의 장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임진왜란이었다. 7년간의 전쟁과 왜적의 침탈 분탕질에 조선 땅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으니 30만 명에 달하는 군사를 포함해 인구의 4분의 3이 죽어 전란이 끝났을 때는 농사를 지을 인력도 연명할 양식도 없어 산 자들은 도단에 빠졌다. 왜란에서 입은 상처를 회복하는데 자그만 치 일백 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세계 전쟁사를 아무리 상고해보아도 임진왜란에 일어난 두 가지 불가사의한 일이 없다. 그것은 왜군이 부산에 상륙해 수도 한양을 점령하기까지 20일도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과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전함으로 수백 척의 왜군함대를 박살내 전세를 뒤집었다는 사실이다. 7년간 병과가 끝난 후 못난 임금이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내린 사후약방문이 얼마나 어리석고 엉터리였던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기막힌 사례가 있다. 신립 장군이 맞선 충주방어 조선군이 맥없이 궤멸되자 선조임금은 즉시 한양을 버리고 몽진했다. 그때 한양 도성을 방어할 병력이 1천여 명 가량 있어 도원수 김명원은 부원수 신각과 함께 한강에 방어진을 치고 적을 맞았다. 그러나 조총사격에 놀란 도원수는 병사들에게 무기를 버리도록 하고 자신은 병졸로 위장하여 도주했다.

분격한 부원수 신각이 남은 병사들을 수습해 왜 진영을 급습, 왜군 수백 명을 죽이는 게릴라전을 벌였다. 전쟁이 끝나고 논공행상에 나선 선조가 참소만 믿고 도원수는 상을 주어 후에 판서로 출세하게 하고 죽기로 싸운 부원수는 사형시켰다. 참으로 소가 웃을 못난 임금의 사후약방문이었다. 그토록 터무니없는 사후약방문을 썼으니 그로부터 사백 년 후에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쓸모없는 약방문이나 써 제키던 조선이 왜국의 후예인 일본한테 어이없이 먹혀 36년간 종살이를 하게 된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아, 저런 어리석고 무책임한 사후약방문을 써 댄 임금이나 잘난 신하들이 저 한 많은 주검들한테서 얼마나 피맺힌 원성을 들었을 것이랴. 사후약방문 짓기를 너무 밝히다간 큰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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