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록파 시인 조지훈 선생 그분은 시인이자 학자요 지사(志士)요 지조 높은 선비의 기개를 가지신 분이다.
시대의 어려움에 통곡도 하실 줄 아는 기개 높은 우국지사이기도 했다.
필자는 대학 3학년 때 현대시론(現代時論)을 수강했다. 졸업 후 군입대해서도 친구들과 만나면 선생의 안부를 물으며 소식을 접하기도 했다. 필자가 속한 부대에서는 북한의 불온한 서적을 제 3국을 통해 우리나라로 보내졌는데 필자는 그것을 등급별로 분류하는 일을 했었다. 하루는 북한의 선전 책자를 검토하고 있었는데 그 책자의 내용 중에 조지훈 선생이 한복을 입고 서재에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사진이 인쇄되어 있어 의아해 했다. 아니, 북한 선전 책자에 조지훈 선생 사진이 실려 있다니 하며 자세히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면에 최초로 ‘동의학(東醫學)박사’ 학위를 받은 조현영 선생이 소개되어 있었다. 그리고 인터뷰 내용 중 남한에 있는 가족들과 조지훈 선생의 안부가 궁금하다는 것이었다.
조현영 선생은 조지훈 선생의 부친으로 제헌 및 제 2대 국회의원을 지낸 분으로 6·25 사변 때 납북되신 분이었다. 참으로 놀랍고 두근거렸다. 어떻게 조지훈 선생께 북한에 부친께서 살아계신다는 소식을 알려드릴까가 나에겐 큰 과제였다.
그 후 68년 정월 초하루 선배들과 더불어 성북동의 선생 댁으로 세배를 갈 기회가 있었다. 세배를 끝낸 후 제자들과 담소를 나누고 세배꾼이 다 나가고 없을 때 선생님 방에 다시 들어가 선생의 부친 소식에 대해 자초지종을 말씀 드렸다.
당시 선생께서는 건강이 그리 좋으신 상태가 아니었는데 부친 소식을 듣는 순간 침착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이시는 듯하면서도 안경 너머 눈빛에 드러나는 기뻐하셨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선생은 당시 대학생들이 존경하고 신뢰하는 스승 중의 한분이셨고 4·19혁명 당시 교수 데모에 앞장서신 분이고 그분의 시 ‘늬들 마음 내가 안다’는 지금도 4·19혁명에 참가했던 학생들에게 가슴에 절절히 스며있는 불후의 명시이기도 하다.
며칠이 지나 같은 학과 원주 동향 친구인 홍기수 군이 혼인을 하게 되었는데 존경하는 조지훈 선생을 주례로 모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조지훈 선생을 모신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라는 것을 친구들도 잘 알고 있었다.
일생일대 경사인 혼인식에 주례로 고민하는 친구를 위해 필자가 모시도록 하겠다고 장담을 했다.
속으로 ‘선생님의 부친 소식을 전해드린 유일한 제자인데 설마 내 부탁은 들어주시겠지’ 하는 속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께서는 건강도 안 좋고 몇 년째 주례를 선 일이 없다고 완곡하게 말씀하시면서도 자네가 부탁하니 내가 주례를 서겠네 하시고 홍기수군의 주례를 서 주셨다. 1968. 1. 21. 대한 추위가 있던 날 남산 드라마센터 예식장에서 주례 서시던 모습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주례사를 시로 대신하시던 선생의 모습이 감동적이었고 홍군의 주례가 조지훈 선생에게는 마지막이셨을 것이다. 선생께서는 그 후 건강이 안 좋으셔서 투병하시다 1968. 5. 17. 47세로 영면하셨기 때문이다.
제자는 스승에게 아무 보답도 못하다가 부친 소식 전해 드린 것 핑계 삼아 힘드시게 주례부탁 하여 힘들게 하신 것 아닌가 하는 괴로움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도 마음에서 지워지지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