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화웅 칼럼
※ 유화웅 칼럼은 2014년 5월 발간된 ‘모든 색깔은 모두 아름답다’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이번호 내용은 2002년 월드컵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축구공, 그것의 위력 참으로 대단하다. 410g~450g의 무게와 68cm~70cm 정도의 둘레를 가진 작은 공, 그것의 위력은 크기와 무게에 비해 가히 가공할만하다. 그 위력을 우리는 2002년 월드컵대회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2002년 6월 4일 폴란드와의 첫 경기에서 황선홍 선수와 유상철 선수가 한 골씩 넣어 2대 0으로 첫 승리를 거두었을 때, 그 감격과 흥분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우리나라 축구도 세계 강호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미국과의 경기에서 안정환 선수가 한 골을 넣어 1대 1로 비기며 상승의 무드를 탔고, 이때 황선홍 선수가 눈 주변이 찢어져 피를 흘리며 붕대를 감고 투혼을 발휘한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
계속하여 포르투갈 전에서 박지성 선수의 결승골은 우리 축구의 면모를 일신하는 게임이었다.
나아가 세계 최강 이탈리아와의 시합에서 2대 1로 승리한 감격과 흥분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특히 16강에 진출하게 된 후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 역사를 만들어 보자(I’m still hungry, Let’s make history)’는 ‘거스 히딩크’ 감독의 말은 우리에게 축구라는 경기의 새 역사를 쓰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 가운데 전 국민의 환희와 환호 속에 지워지지 않는 영상이 있다.
이탈리아와의 시합에서 전반 시작 9분 만에 수비수 김태영 선수가 이탈리아 복싱 선수 출신 크리스티안 비에리(Christian Vieri)가 휘두른 왼팔에 코뼈가 부러졌다.
게임 흐름으로 보아 김태영 선수를 빼고 다른 선수로 교체할 상황이 아니었다. 김태영 선수는 다친 코를 개의치 않고 후반 18분까지 사력을 다해 맡은 소임을 다했다.
이탈리아와의 시합을 승리로 끝낸 후 다음 경기가 문제였다. 스페인과 8강전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히딩크 감독의 고민이었을 테고 또 김태영 선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코 수술 후 특별한 기구로 고정하지 않으면 출전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코 수술을 받았지만 그 상태로 경기를 계속 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급박한 상황에서 궁하면 통한다(窮則通).’ 는 말대로 일본 국가대표 미야모토(Miyamoto Tsuneyasu)가 코뼈가 부러졌을 때 마스크를 쓰고 출전했던 것이 떠올랐고, 유상철 선수가 일본 J-리그 요코하마 소속으로 있었으므로 6월 19일 새벽에 미야모토 선수의 마스크를 만든 일본인을 찾아내어 오전 그가 한국에 와서 10시간에 걸쳐 마스크를 제작했다고 한다.
하나는 연습용으로 또 하나는 경기용으로 마스크를 만들었는데 한국 선수의 유니폼과 붉은색 응원단의 색깔에 맞추어 붉은색 마스크로 했다고 한다.
이 마스크를 쓰고 그라운드를 누빌 때 관중은 더욱 환호했고 그의 투혼은 눈물겨웠을 정도였다. 마스크를 쓰고 사력(死力)을 다하는 그 모습에서 사명(使命)을 뛰어 넘어 소명(召命.calling)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곧 ‘목숨을 불렀다.’ ‘목숨을 내놓았다’는 말이다. ‘사명(使命)’이 ‘지워진 임무’, ‘맡겨진 임무’라고 한다면 소명(召命)은 그 이상의 단계로 ‘절체절명’의 의미가 있다.
가끔 신문 지상이나 방송에서 복지부동(伏地不動)이나 무사안일(無事安逸)이니 하며 공직 사회나 기타 사회 구성원에 대하여 비판하는 말이 등장한다.
개중에 무사안일 한 사람도 있고 무위도식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세계열강의 반열에 오른 것은 그래도 황선홍 선수와 김태영 선수처럼 죽기를 각오하고 모든 분야에서 앞을 향해 달려온 결과라고 생각한다.
김태영의 마스크는 우리 국민의 마스크였다.
프로 선수는 운동장을 탓하지 않듯이 모든 여건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6.25동란 후의 잿더미를 일구어서 세계가 부러워하고 벤치마킹하는 나라로 성장한 그 의지와 열정과 소중한 경험이 축적되어 있다.
‘세상이 언제는 안 어려웠나?’ 극복하고 사는 것이다.
김태영 선수가 마스크를 쓰고 그라운드를 누비며 온 국민을 감동과 열광으로 몰아넣었듯이 어려울 때, 힘들 때 서로 격려와 배려와 용서와 사랑의 마스크를 쓰고 위로 받으면서 이겨나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