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처럼 한·일관계가 작은 것을 탐내 차지하려다 큰 것을 잃는 소탐대실의 우愚를 장이야 멍이야 주고받으며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때도 없었던 것 같다.
한일양국이 어엿한 경제대국으로 발전한지가 무려 70년이나 되었는데 한국인은 여전히 일본인을 ‘왜놈’이라 경멸하고 일본인은 한국인을 ‘죠센진’이라고 비하하는 의식 속에 갇혀 살고 있다.
두 나라는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나아가 모두가 내심으로 수긍하고 있는 것이지만 일본이 한반도를 조상의 나라라고 할 만큼 한 조상의 후예라는 혈연관계를 가지고 있다.
세계 어디에도 그와 같은 관계를 가진 나라가 없다. 한데 양국은 임진왜란과 한일합방으로 시작된 36년간의 식민통치를 통해 원수지간이 되었다.
그리고 그 식민지배에서 광복한 지가 어언 70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일제하에서 입은 민족적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 갈등을 빚고 마찰을 일으키며 한국은 배일감정을 일본은 혐한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 또한 세계 어느 국가 간에서도 볼 수 없는 해연한 현상이다.
한일간의 복잡한 문제를 여기에다 언급할 수는 없으므로 일본의 오만한 우월감에서 비롯된 억지에 우리가 얼마나 현명치 못하게 대처하고 있는 가에 대해 살펴본다.
더도 말고 우리가 일본을 평가하고 대함에 있어 극일克日과 배일排日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전자는 일본과 경쟁하여 이기는 것이고 후자는 일본을 감정 나는 대로 배척하는 것이다.
전자는 선린 국으로 오가며 살면서 뒤떨어진 것들을 발전시켜 일본을 능가하고 이기는 것이며, 후자는 아쉽고 명분이 없어도 밥맛없다 미워해서 적대시하는 것이다.
저 두 가지 길 중에 어떤 길을 갈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은 적어도 한국의 경우는 조금도 어렵지 않다. 해서 한국인은 서슴지 않고 다분히 극일보다는 배일의 길을 택해 지금까지 가고 있다.
극일 하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고 배일하는 것은 마음이 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현명하게 극일 하는 길을 달려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일관계에서만은 우리가 얼마나 비이성적 충동에 의해 배일의 길을 걸어왔던 가 모른다.
지금은 개선이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지만 어느 핸가 대일무역적자를 보면 우리나라가 독립하여 일본과 무역을 한 이래 단 한 번도 흑자를 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적자규모가 사상최대였다.
상반기 적자만도 125억 달러에 달했다. 그 적자폭은 같은 기간 전체 무역흑자 70억 달러의 무려 1.8배에 달했으니 일테면 다른 나라에서 죽어라 수출해서 번 이익을 고스란히 일본에다 갖다 주는 형국이 된 것이다. 저보다 더 바보스럽고 맥 빠지는 일이 어디 있으랴 싶다.
우리가 감정 나는 대로 배일하는 게 당장에는 시원하고 자존심을 세우는 것 같지만 국민이 보다 잘 먹고살고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극일 하는 건 저런 발전과 깊이 연관돼 있다. 소탐대실의 우를 범하지 않고 희망적인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서라면 말할 것도 없이 극일에 나서야 한다. 냉정하게 우리가 서둘러 극일 할 국가적 과제를 몇 가지만 들어도 가슴이 답답하고 초조해진다. 왜국시절만 해도 여러 가지 기술을 전수해 준 나라는 한반도의 삼국이었다.
한데 어찌하여 조총소리에 혼비백산하여 조선이 왜적에게 여지없이 짓밟혔으며 일본이 노벨과학상을 무려 23명이나 받았는데 우린 단 한 명도 받지 못할 정도로 후진 되었는 가.
도시 광복된 지가 몇 년이나 되었는가, 자그만 치 70년이나 되었다. 우리가 배일감정을 누르지 못하고 극일에 실패한 사이에 단 한 번도 엄청난 무역적자는 매년 계속되어 왔으니 그 누적 액이 실로 천문학적 규모에 달한다. 이 창피하고 속상한 관계를 후대에 물려 줄 건지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다.
냉정하게 극일 할 국민적 공감과 단합되고 지속적인 행동이 긴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