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을 가진 사람은 결코 외롭지 않은 데, 이는 반드시 그와 뜻을 함께 하는 이웃과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공자-
성경에는 위대한 질문이 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는 물음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여행하던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길을 가던 중 강도를 만나 얻어맞고 옷과 몸에 지닌 모든 것을 빼앗긴 채로 길가에 버려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침 지나가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보고도 멈추어 도와주지 않고 오히려 한쪽으로 피해 갈 뿐이었습니다.
그때, 그 당시 종교적으로 버림받은 사람으로 간주되던 사마리아인은 이 남자를 보고 멈추어 도와주었습니다. 그는 이 상처 입은 남자를 도왔을 뿐 아니라 그를 근처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는 주인에게 돈을 주며 돌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좋은 이웃과 친구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1970년 프린스턴 대학교 연구자들은 신학생을 대상으로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의 상황을 설정해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펴보는 실험을 했습니다.
학생들에게는 신학생과 소명에 관한 연구 실험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인터뷰 후에는 캠퍼스 안의 다른 건물로 이동하여 대화를 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학생들에게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관해, 어떤 사람들에게는 신학생의 소명에 관해 이야기할 거라고 했습니다. 조사자는 그 건물로 가는 방향을 알려주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이동하는 도중에 각 학생은 분명히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되고 이 사람에 대한 반응을 알아보기 위한 실험을 진행합니다.
그러나 그 실험 결과는 거의 대다수의 학생들이 이동 중에 위의 환자를 만났지만 가던 길을 멈추고 이 낯선 불청객을 도와주는 이는 거의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지식은 그의 행동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이 실험에 참여했던 뱃슨의 말대로 “대학생들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강연을 하러 가던 길에 말 그대로 피해자를 뛰어넘고 달려가는 일이 실제로 여러 번 일어났다. 미래의 성직자 40명 중에 16명만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주었다.” 라고 말하면서 강연의 주제로도, 신앙심의 정도로도 고통 중에 있는 그에게 도움의 여부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고통을 함께하기 위해서는 지식이 아니라 바로 고통가운데 있는 그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의 처지가 되려는 마음, 즉 공감이 필요합니다.
“덕(德)을 가진 사람은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친구’는 자신이 즐겁고 외롭고 때로는 힘들 때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박제가는 친구를 다음의 세 부류로 정의했습니다.
먼저 술친구가 있습니다. 당시 술친구, 즉 ‘주우(酒友)’로 ‘사실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술기운으로 자신도 모르게 말하는 친구’를 말합니다. 사실 가까운 친구는 아닙니다. 그리고 눈앞에서만 아는 척하는 사람은 면우(面友)라고 합니다. 얼굴만 아는 현실적 관계의 친구로, 페이스북 등과 같은 SNS 상에서의 친구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마지막으로 붕우(朋友)가 있는데, 연암 박지원은 붕우에 대해 재미있는 해석을 합니다. 붕(朋)은 새의 양 날개이며 우(友)는 사람의 양손이라는 것입니다.
참된 친구란 새에게 두 날개가 있고, 사람이 양손이 있는 것과 같이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를 말합니다.
노년의 매력은 지금까지 살며 길러진 공감능력으로 서로 돕는 삶을 사는 마음의 여유인 것 같습니다.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덕(德)이 있는 사람입니다.
덕(德)이 있는 사람은 이렇게 벗이든 친구든 붕우이든 삶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공유하기에 노년이 외롭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