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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 속 공포 떨던 소년병과 편지로 희망 준 소녀

베트남전 참전 석정운 씨, 소녀에서 백발된 김임순 씨 51년 만에 만나
51년 전 베트남전 당시 위문편지로 서로 힘이 됐던 석정운(왼쪽) 씨와 김임순 씨가 19일 진주시청에서 함께 손을 잡은 채 밝게 웃고 있다.
“참 소중한 인연입니다. 늘 건강하시고 후회 없는 알찬 삶을 잘 마무리하길 바랄게요. 잊지 않고 기억해 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19일 경남 진주시청 프레스센터에서 칠순 백발의 김임순(72·여·진주시) 씨가 마주 앉은 석정운(70·전북 군산) 씨에게 한 권의 책을 선물하며 손글씨로 꼭꼭 눌러쓴 글을 읽었다. 김씨가 석씨에게 건넨 책은 소설가 최인호의 ‘인연’.

두 사람의 인연은 5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석씨는 1967년 3월 3일 베트남전에 참전해 포화 속 사선을 넘나들었다. 그의 나이 겨우 18세였다.

맹호부대 26연대 혜산진 6중대 2소대 소년병은 곧바로 전투에 투입됐고 눈앞에서 전우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언제 죽을지 모를 불안과 공포를 겪던 소년병에게 희망을 준 것은 한 통의 편지였다.

한국에서 김씨가 보낸 위문편지다.

진주의 옛 경남일보에서 근무하던 김씨는 월간 여학생지에서 ‘위문편지를 보냅시다’란 광고 글과 함께 적힌 장병 이름을 보다 석씨를 발견했고 편지를 보내기로 했다.

김씨는 “고국을 잊지 말고 꼭 살아서 돌아오라는 등 내용을 적었다”고 기억했다.

석씨는 “당시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김씨의 편지를 기다리는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고 털어놨다. 석씨는 전투 속에서도 김씨가 보낸 편지를 가장 소중하게 여겨 철모 속에 고이 접어 보관했다.

석씨는 고국으로 돌아오면서 김씨에게 받은 위문편지를 모두 챙겨 왔다.

이후 집에 불이 나 편지와 사진이 모두 타버렸지만, 김씨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그대로 남았다.

2013년 7월 석씨는 편지에 적혀 있던 '진주 경남일보'를 떠올렸고 이 신문사에 '위문편지 소녀'를 찾아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마침내 김씨로부터 연락이 닿았다. 두 사람은 전화로 통화하다 이날 처음 만났다.

석씨는 “두 살 위인 누님께서 보내준 편지가 전쟁의 공포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이었다”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김씨는 “우리 오빠도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그 어린 나이에 생사가 갈리는 전장에서 제가 보낸 편지가 힘이 됐다니 오히려 감사하다”고 화답했다.

칠순을 넘긴 두 사람은 건강이 좋지 않지만 만남을 계기로 힘을 내기로 했다.

김씨는 이날 석씨에게 책과 함께 손으로 엮은 예쁜 매듭 팔찌를 선물했다.

따뜻한 눈빛으로 선 두 사람은 서로의 건강과 축복을 빌었다.

 이계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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