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절로 부르는 사찰(寺刹)은 승려가 불상을 모시고 불도(佛道)를 닦으며 교법(敎法)을 펴는 집이다. 도(道)를 얻고자 수행하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도량(道場)이라고도 하고, 승원·가람(승가람마) 등 수십 가지의 이름을 갖고 있다. 서기 4세기 우리 땅에 처음 유입된 불교는 토착 신앙, 풍수와 만나 명산에 자리 잡은 한국의 사찰은 당대의 문화 그 자체이기도 하다.
산중에서 주변의 지형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자리 잡은 사찰이 ‘산사(山寺),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앞두고 있다. 해남 대흥사,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보은 법주사가 그 주인공이다.
해남 대흥사, 작은 마을 같은 사찰
대흥사로 들어가는 두륜산 숲길이 시작되자마자 마법처럼 숨이 탁 트였다. 울창한 구림구곡(九林九曲)의 숲길을 지나며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그저 장관이다.
사찰의 시작점을 알리는 일주문을 지나 사찰로 들어가는 관문인 해탈문에 서면 탁 트인 대흥사 앞마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참을 숲길로 들어온 것을 잊을 만큼 널찍한 분지다. 초의선사가 만들었다는 굴곡 있는 연못 무염지가 보이고 낮은 돌담이 당우(堂宇)를 둘러싸고 있어 단정하고 소박하게 꾸며놓은 작은 마을 같은 느낌이다. 꽤나 큰 사찰인데도 산이 포근히 둘러싸고 있어 아늑하다.
사찰을 지키는 사천왕문이 없는 이유도 북쪽의 월출산, 남쪽의 달마산, 동쪽의 천관산, 서쪽의 선은산이 대흥사를 감싸고 있는 풍수명당이기 때문이라 한다. 일찍이 이 터의 가치를 알아본 서산대사는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 만 년 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이라고 했다. 묘향산에서 입적하며 의발(衣鉢, 가사와 공양 그릇)은 해남 대흥사에 두라고 한 이유다.
조선 명필의 글씨들
금당천을 건너면 대웅보전(大雄寶殿)이다. 대웅보전이 사찰의 한가운데가 아닌 북쪽에 물러서 있는 것도, 사찰 규모와 비교하면 대웅보전 마당이 작은 것도 여느 사찰과는 다른 점이다.
대웅보전이 있는 북원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조선 후기 쌍벽을 이루는 두 명필, 원교 이광사(1705∼1777)와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글씨다. ‘대웅보전’이 이광사의 글씨, 왼편 요사채인 백설당에 걸린 ‘무량수각’(无量壽閣)이 추사의 글씨다.
두 명필의 글씨가 나란히 걸리게 된 일화도 유명하다.
완도군 신지도에 유배 온 이광사는 대흥사의 대웅보전과 침계루, 천불전의 편액을 썼다. 이광사의 ‘원교체’는 18세기 조선의 고유서체인 ‘동국진체’를 완성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추사는 원교체를 무시하고 깎아내렸다.
제주도에 유배 가는 길에 친구인 초의선사가 있는 대흥사에 들른 추사는 이광사의 글씨를 보고는 ‘저것도 글씨냐, 당장 떼어버려라’ 하고는 자신의 글씨를 대신 걸게 했다. 8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가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른 추사는 과거 자신의 교만을 인정하며 원교의 편액을 다시 걸라 했다 한다.
호남의 명필 창암 이삼만(1770∼1845)은 대흥사 한가운데 남원의 출입문인 가허루(駕虛褸)의 현판 글씨를 썼다. 평생을 초야에 묻혀 글씨만 쓴 창암은 유배길에 오른 추사 앞에 자신의 글씨를 내놓는다.
16살이나 어린 추사는 ‘시골에서 밥은 먹겠다’며 창암을 모욕했다. 창암은 분노하는 제자들을 달래며 ‘글씨를 아는지는 몰라도 묵향은 모르는 사람'이라 했다 한다. 유배 생활 동안 깨달은 추사는 창암을 찾아 사과하려 했으나, 창암이 세상을 떠난 뒤였다. 추사는 애통해 하며 창암의 묘비문을 남겼다.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
이끼 낀 바위를 타고 내려와 길가에 잘 익은 산딸기를 따 먹으며 일지암으로 향했다. 서산대사와 함께 대흥사를 상징하는 초의선사가 지은 암자다. 이곳에서 초의선사는 차와 선은 하나라는 다선일미(茶禪一味) 사상을 담은 ‘동다송’(東茶頌)을 펴냈고,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와 차를 통해 교류했다.
추사는 초의에게 빨리 차를 보내달라고 조르는 편지를 자주 보냈고, 차에 보답하는 ‘명선’(茗禪)을 써서 남겼다. 연못에 돌을 쌓고 기둥을 세운 누마루나, 가운데 방 한 칸을 두고 사면에 툇마루를 두른 정자의 운치가 그만이다. 초의선사가 열반에 든 뒤 폐허가 됐다가 복원한 것이다. 초의선사의 다도 정신을 기리는 초의문화제가 매년 열린다.
등산로를 다 내려오면 표충사 뒤편 호젓한 곳에 스님들이 참선하는 선원으로 사용되는 대광명전 구역이다. 대광명전은 초의선사가 유배 중이던 추사의 방면과 축수를 위해 지은 전각이다. 동국선원의 편액은 추사의 글씨다 최성 기자/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