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서부전선 백마(白馬)고지는 철원 평야의 곡창지대를 관장 할 수 있는 경제적 군사적 요충지였다.
수 많은 희생을 감수하며 뺏고 빼앗기던 격전지였다.
골프 시작 후 가장 힘든 시기가 대개 백돌이 백순이 시절이라고 한다. ‘100타를 넘나들며 매번 분통이 터진다. ‘백타고지’를 점령하는 일은 백마고지 전투나 다름 없다.
우리 전통에도 생후 100일은 중요한 전환점으로 잔치까지 벌여준다.
골프를 시작해서 첫 ‘머리(생애 첫 라운드)’를 올리면 대부분 불이 붙는다.
1991년, 40살 되던 해 봄 어느 날, 거래처에서 중고 채 한 세트를 나 몰래 내 차 트렁크에 실어 놓고 밤에 전화로 연습장에 한 번 갖고 가 보라고 했다.
다음 날 퇴근하며 가까운 야외 연습장에 가 본 것이 내 골프 인생의 시작이었다.
내가 술을 못 하니까 접대 방법이 마땅치 않아 고민 끝에 거래처에서 이런 공작을 벌인 것 같았다.
연습 4개월 만에 경기도 오산 H 골프장에서 첫 라운드를 했다. 복장도 잘 몰라 양복바지에 와이셔츠 소매 걷어 올리고 나왔더니 캐디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 해 6월 하순, 함께 시작해서 골프에 빠진 친구 셋과 제주도로 내려갔다. 3일 연속 칠 계획으로 100타를 깨지 못하면 서울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각오였다.
그 쯤 제주도는 이미 장마의 시작이다.
매일 보슬비가 오락가락 했다. 제주시 근처 27홀 O골프장, 해 뜨기 직전에 올라가서 캐디 마스터에게 0이 다섯 개 붙은 수표 한 장으로 인사를 하고 종일 플레이 한다고 말했다.
제주 토박이 비바리(아줌마) 캐디 네 명이 나타났는데 키가 골프백 높이와 비슷하여 백을 매고 제대로 걸을 수 있을까 걱정 될 정도였다. 카트는 물론 없었다.
9홀 마치고 나오면 마스터가 마중 나와 곧바로 다른 9홀 코스로 안내했다. 기다리는 손님을 앞질러 끼워 넣는 것 같았다.
쉬지 않고 강행군 36홀을 마치고 늦은 점심을 먹었다. 오후 라운드도 거뜬히 추가하여 총 54홀을 쳤는데 피곤은 커녕 아무렇지도 않고 시간도 넉넉했다. 비바리 캐디들에게 고생했다고 후한 보너스도 쥐어 줬다.
숙소에 와서는 저녁 식사 후 당연히 주당 대회까지 개최하고 다음 날도 같은 시간에 같은 방법으로 빗속 54홀을 소화했다.
고맙게도 전 날과 같은 캐디들이 나와 주었다. 점수는 좋아졌으나 백타고지는 점령이 안되었다.
3일째 골프장에 나타났더니 캐디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귓전에 들렸다.
“서울 또라이 아저씨들 또 왔슈다게 ㅋㅋ”
맞다. 우리는 골프에 완전 얼이빠진 놈들이 된 셈이다.
감탄스러운 일은 그 날 동행한 캐디 중 3명은 3일째 연속 우리 백을 맨 비바리들. 걱정마라 끄떡없다는 표정, 억척스러운 제주 여자들이다. 팁을 많이 주긴 했지만 체력의 한계도 있을 텐데.
그 날 우리 중 셋은 온 몸이 젖은 채 마침내 ‘백타고지’를 점령했다.
클럽 하우스로 돌아오는데 엄청난 피로가 갑자기 몰려오고 발걸음은 천근 만근.신발 속 양말 사이로 핑크빛 물이 걸을 때마다 찔끔찔끔 솟아 올라 왔다. 염색 물이 빠졌나?
락카에서 신발을 벗어 보니 이럴 수가! 발바닥에 물집이 터져 피부와 양말이 엉겨붙어 떡이 되어 있지 않은가. 절룩거리며 겨우 욕실에 들어가 피부와 양말을 분리하고 보니 발바닥이 온통 다 벗겨져 있었다. 그래도 100타를 돌파한 기분은 날아갈 듯 했다.
그 이후에도 우리는 자주 제주도 원정을 갔었다. 골프장 캐디들이 다 아는 ‘서울 또라이 아저씨’라는 별명을 훈장처럼 달고 말이다.
30년이 거의 다 돼 가지만 지금도 기회만 되면 나는 ‘백타고지 전투’ 무용담을 늘어 놓는다. 내 골프 일생에서 가장 뚜렷한 추억이니까. 백마고지 전투처럼 뼈를 깎는 희생이 없었으면 오를 수 없는 ‘백타고지’다. 치열한 수중전투였다.
나는 이 무용담을 당시 함께 했던 전우,캐디 여사님들께 바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