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장관·국방장관·유엔대사 동시다발적 대북압박 메시지
매티스 ‘훈련재개’시사… 폼페이오 “北약속이행 준비돼야”
헤일리 ‘제재유지’… WSJ “내년 봄 독수리 훈련 가능성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대북 정책기조가 ‘전면 압박’ 모드로 급전환하고 있다.
대화와 협상이라는 외교적 수단만으로는 더이상 북한의 선(先) 비핵화 조치를 끌어내는데 한계가 있다고 보고 비(非) 외교적 카드까지 동원하며 압박의 수위를 급격히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지난달 28일(현지시간) 하루에만 대북정책을 이끄는 국무·국방장관과 유엔주재 미국 대사가 워싱턴 D.C.를 무대로 ‘공개적 메시지’ 형식을 빌려 북한을 향한 동시다발적인 압박성 발언을 내놨다.
가장 먼저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은 북한이 가장 예민해 하는 ‘한미연합훈련’ 재개 가능성을 거론하고 나섰다. 매티스 장관은 지난달 28일(현지시간) 기자회견에서 6·12 북미정상회담의 결과물로 ‘유예’된 한미연합 군사훈련에 대해 “현재로서는 더는 중단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미국의 비핵화 시간표대로 움직이지 않는 북한을 향해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방북취소라는 ‘극약 처방’을 한 지 나흘 만에 나온 초강경 대북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매티스 장관의 기자회견과 보조를 맞춘 듯,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를 주도하고 있는 니키 헤일리 유엔주재 미국 대사도 거들고 나섰다.
헤일리 대사는 이날 워싱턴D.C.에서 열린 한 콘퍼런스에서 “우리는 제재와 비핵화에 대한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고, 우리의 태도를 바꾸지 않을 것”이라며 대북 압박을 계속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는 북한과의 협상과정에 대해 “느리고 험난한 과정이 될 것임을 알고 있다”고도 했다.
대북협상을 총괄지휘하는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이날 ‘협상 장기화’를 시사한 것도 그 연장선에서 주목된다. 폼페이오 장관은 이날 헤더 나워트 국무부 대변인을 통해 발표한 메시지에서 “평양 방문을 연기한 결정에도 불구, 미국은 김 위원장이 싱가포르 정상회담 때 트럼프 대통령에게 한, 북한을 완전하게 비핵화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할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면 관여(engage)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이 같은 움직임은 판이 깨질지도 모를 위험 부담을 안고 다각도의 압박수단을 총동원하며 협상력을 극대화하는 ‘트럼프식 벼랑 끝 전술’의 일환이지만, 자칫 역사적 북미정상회담을 계기로 모처럼 조성된 한반도 데탕트 무드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워싱턴 외교가가 가장 주목하는 것은 매티스 장관이 그동안 꼭꼭 접어뒀던 ‘군사훈련’ 카드를 꺼내 든 것이다. 이날 발언은 조지프 던퍼드 합참의장과 함께 진행한 기자회견의 일문일답 과정에서 ‘북한이 비핵화하지 않고 있다는 최근 보도에 비춰볼 때 이제 한미연합 군사훈련을 재개할 시간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 과정에서 나왔다.
애초 이 질문은 던퍼드 합참의장을 향한 것이지만 매티스 장관이 자청해 답변에 나섰다. 매티스 장관은 현재로서는 더이상 한미연합 군사훈련을 중단할 계획이 없다는 걸 전제로 하면서 “우리는 협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보고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미래를 헤아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장 점칠 수는 없다. 협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보자”라고 했다.
대북 전면전을 가정한 대규모 연합훈련인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연습과 국지도발에 대비한 해병대연합훈련(KMEP·케이맵) 등 이미 중단한 훈련 외에 나머지 훈련들의 경우 현 시점에선 기존 계획에 변동이 없지만, 내년 UFG 실시 여부 등 구체적인 재개 상황은 비핵화 협상에 연동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와 관련해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매티스 장관의 발언이 내년 봄 독수리 훈련(폴이글)을 예정대로 할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라며, UFG 연습 일정의 재조정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매티스 장관은 다만 “내년에 훈련이 재개된다면 ‘도발적 조치’로 봐야 하느냐”는 질문에 “그런 식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 자체가 협상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외교가 진전될 수 있도록 하자. 우리는 외교관들을 뒷받침하는 것”이라며 협상 판을 깨지 않기 위해 언어선택에 신중을 기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협상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언급했다.
매티스 장관의 발언은 ‘현재로서는’이라는 단서를 단 데다 비핵화 협상과 연계해 한미연합훈련을 언급한 한 점에서 원칙론적인 입장을 밝힌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북미협상이 난관을 만난 시점에 나왔다는 점에서 파장이 주목된다.
트럼프 행정부의 군사훈련 재개 시사에 대해 북측이 반발할 것으로 예상되는 등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 무산 이후 북미 간의 긴장이 더 고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전망이다.
북한은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취소 이후 “최근 미군 특수부대들이 일본과 필리핀, 그리고 남조선의 진해 해군기지에 기어들어 우리를 겨냥한 비밀훈련을 벌이고 있는 사실이 폭로되었다”고 주장하며 ‘백해무익한 군사적 도박’ ‘범죄적 흉계’ ‘군사적 힘에 의한 제도전복의 망상’ 등 연일 미국의 ‘군사 행보’에 대한 원색적 비난을 퍼부었다.
매티스 장관의 이날 발언은 협상 답보에 실망한 트럼프 행정부 내의 현 대북 기류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이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을 전격 취소한 것은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이 보낸 적대적 내용의 ‘비밀 편지’가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했으며, 이 편지에는 비핵화 협상이 “다시 위기에 처해있으며 무산될 수도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고 미국 언론들은 보도했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24일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 취소를 발표하면서 비핵화에 충분한 진전이 없다고 처음 인정했을 정도로 현재의 교착 상황 및 전망에 대한 좌절감과 회의감이 반영된 것 아니냐는 것이다.
뉴욕타임스(NWT)는 “북미 간 외교적 해빙이 곤란에 처한 듯한 상황에서 나온 매티스 장관의 발언은 지난주 고조된 북미 간 긴장을 더 높여주는 대목”이라고 보도했다.
NYT는 “그의 언급이 북한의 핵 야욕을 억제하기 위한 트럼프 행정부의 노력에 대한 일치된 전환을 시사하는 건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더딘 비핵화 협상 속도에 대한 좌절감과 북한이 비핵화를 위한 실질적 조치를 하지 않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커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전했다.
이번 조치가 북한의 반발을 부를 가능성도 제기된다. 핵확산 전문가인 비핀 나랑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교수는 AFP 통신 인터뷰에서 “이 모든 것이 깨져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김정은(북한 국무위원장)은 위성 발사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