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평생에 가장 듣기 싫은 말이 늙는다는 말이요 가장 들어 기분 좋은 말이 젊다는 말이다.
두 가지 말이 다 쉴 새 없이 흘러가는 세월을 따라 닥쳐 아무도 피할 수 없음에도 사람들은 젊어지고 늙지 않으려는 헛되고 헛된 꿈을 버리지 못한다. 그리고 입으로는 이놈의 밥맛없는 세상살이 지겨워 어서 죽어야지 되뇌면서도 분을 바르고 수염을 깎으며 호호야들조차도 백수를 거뜬하게 살겠다며 젊게 사는 데 심혈을 기우린다. 이구동성으로 생물학적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당장 허리는 구부러지는데 아리송하게 말한다.
과연 늙는다는 정의를 대폭 수정할 때가 된 것일까.
늙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인식이 구구하고 표현이 각색이다.
미국의 샤갈이라고 불리는 미술가 해리 리버만은 백수의 장수를 누리고 103세에 생을 마쳤다. 그는 102세 때 인간의 늙음에 대하여 이렇게 술회한 적이 있다.
“난 내가 젊지 않다는 걸 안다. 그렇다고 내가 늙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내가 102세 만큼 성숙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성숙은 나이를 따라 자라게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노쇠현상에 성숙이라니 그 철학적 함의의 차이가 자못 혼란스럽다.
그는 놀랍게도 70세 넘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노인학교에서 장기를 두는 것을 유일한 삶의 낙으로 삼았다.
31년 동안 22번에 걸친 작품전시회를 열었는데 102세 때 22번 째 전시회를 열어 노익장을 과시했다.
그는 ‘자신이 몇 년이나 더 오래 살 수 있을 가는 생각하지 말고 내가 어떤 일을 더 할 수 있을 가를 생각하라’고 했다.
뭔가 할 일이 있는 것, 그게 바로 삶이라고 했다.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는 사람, 남들이 포기해버린 것을 하는 사람이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저런 늙음에 대한 확고하고 긍정적인 신념을 소유하고 그림그리기와 장기로 삶의 보람과 낙을 즐기며 살았기 때문에 장수할 수 있었다.
건강하고 즐겁게 장수할지 여부는 할 일과 재미거리에 깊이 연관돼 있다.
괴테가 80세에 60년이나 묵혀둔 파우스트를 완성해 불후의 명작을 만든 거며
베르디 역시 80세에 저 유명한 오페라 ‘오셀로’를 작곡한 게 다 장수하게 만든 생활인자 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늙는다는 것을 나이 먹는 것과 동일시해서 한 살을 더 먹을 때마다 그만큼 더 늙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노화를 촉진할 뿐이다.
또한 나이 따라 육체가 어김없이 노쇠 한다고 믿고 갖가지 항 노화에 매달리는 것도 지혜로운 방법이 아니다. 육체의 노화가 나이를 따라가지 못하도록 하려면 뭔가 할 일이 있어 희망도 걸고 재미도 누리며 몰입하여 보람을 느끼는 삶이어야 한다.
나이 먹는 것은 신위 영역의 일이고 할 일을 찾아 재미와 보람을 누리며 사는 것은 인위 범주의 인간의 일이다.
그러므로 늙는다는 자연현상을 어떻게 인식해 사느냐는 인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역시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사실 늙는다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의 공포 때문이며 일체의 속연과의 이별이라는 단절 때문이다.불가에서는 죽음을 인간의 공허한 멸실로 여기고 속연의 단절을 애달파 함은 미망일 뿐이라고 하지만 늙는다는 게 저 두 가지 슬픔으로 다가가는 것임은 영원불변의 숙명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