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 l 축소

'역사의 섬' 강화 교동도

분단의 아픔과 통일의 여망이 공존하는 곳
강화도와 교동도를 잇는 교동대교.
강화도는 선사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유구한 역사의 페이지를 하나씩 간직하고 있다.

세계유산이 된 고인돌과 ‘시조’ 단군이 쌓았다는 마니산 참성단이 남아 있다. 군사적 요충지로서 몽골의 침입기에는 수도 역할을 맡기도 했다. 왕과 왕족의 단골 유배지였던 이 섬은 일제의 한반도 침탈이 시작되는 출발점(강화도조약)이 되기도 했다. 지금은 북한 땅을 바로 마주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분단의 아픔과 통일의 여망이 공존하는 곳으로 주목받는다. 강화도가 품은 ‘섬 안의 섬’ 교동도에서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봤다.

북한 땅이 맨눈으로 건너다보이는 이곳은 여전히 민간인 출입통제 구역이다.

 

최초로 공자 초상 모신 교동향교

교동도 동쪽 화개산 아래의 교동향교(시도유형문화재 제28호)는 고려와 조선 시대의 지방 교육기관이다. 교동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년)에 지어졌다. 교동향교는 향교 중의 으뜸이라는 뜻의 ‘수묘’(首廟)로 꼽힌다.

서해 고도(孤島)의 향교가 수묘로 꼽히는 이유는 이 땅에서 공자상을 처음 모신 곳이기 때문이다. 어찌 된 사연일까.

고려의 수도 개경(현재의 개성)은 국제적인 무역도시였고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가 그 관문이었다. 교동도는 벽란도로 가는 상인과 사신이 탄 배가 물때를 맞추기 위해 기다리던 기착지였다. 충렬왕 12년(1286년) 원나라에 간 안유(안향, 1243∼1306)가 공자의 초상을 가져왔다. 배를 타고 개성으로 돌아가던 길에 교동도에서 물때를 기다리는데 공자의 초상을 아무 데나 둘 수 없어 교동향교에 모셨다고 알려져 있다.

 

목은 이색이 책 읽던 화개사

향교를 나와 화개산 기슭으로 올라가면 화개사가 있다.  

일주문도, 사천왕문도, 다른 부속 건물도 없이 최근에 덧붙여 지은 듯한 살림집이 딸린 작은 법당 건물 하나가 축대 위에 홀로 올라앉아 있다. 법당 앞마당에 서니 남쪽으로 석모도가 보인다.

이 작고 적막한 사찰에 이야기를 더해주는 것은 고려 말 문신이자 정치가인 목은 이색(1328∼1396)이다. 화재로 모든 것이 불에 타는 바람에 고려 때 창건됐다는 것 말고는 다른 역사를 알 수 없는 이 사찰은 이색이 독서를 하던 곳이라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남아 있다.

화개사가 자리 잡은 화개산(259m)은 교동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정상에 오르면 북쪽으로는 황해도의 연백평야와 예성강 하구, 개성의 송악산이 보이고 남쪽으로는 서해와 석모도가 보이는 이 산을 이색은 전국의 8대 명산으로 꼽았다 한다.

교동읍성
왕족들의 유배지

강화와 교동은 고려부터 조선까지 1000 년 동안 왕족들의 유배지였다. 서울과 가까운 섬이기에 감시와 격리가 쉬웠기 때문이다. 고려의 희종과 강종, 충정왕, 우왕, 창왕이, 조선의 광해군, 안평대군, 영창대군, 사도세자의 장남 은언군, 흥선대원군의 손자 영선군 등이 이곳에 유배됐다.

정치적 반대파를 잔혹하게 숙청하는 사화(士禍)를 일으키며 폭정을 일삼던 조선 10대 왕 연산군(1476∼1506)이 중종반정으로 폐위돼 위리안치(圍籬安置, 유배된 죄인이 거처하는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된 곳도 바로 교동도다.

연산군은  유배된 지 두 달 만에 역질에 걸려 31살의 나이에 숨졌다. 연산군의 무덤은 부인인 폐비 신씨의 청에 따라 중종 7년에 경기도 양주(현 도봉구 방학동)로 이장했다. 연산군이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 만들어진 '교동도유배문화관'에서는 이런 왕족 유배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분단의 아픔 속 피어오르는 통일의 희망

한반도가 두 동강 나기 전의 교동도와 북한 황해도 연백군(현 황해남도 연안군·배천군)은 같은 생활권이었다. 교동도에서 북한 땅과의 거리는 3㎞ 남짓, 최단 거리는 2.6㎞에 불과하다. 교동도와 황해도 사이 바다는 물이 빠지면 모래톱이 드러난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황해도 주민 3만여 명이 잠시 피난 왔다가 한강 하구가 가로막히면서 실향민이 됐다. 이들은 고향 땅과 그곳에 두고 온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섬 서쪽 북단 율두산 아래에 비를 세우고 매년 제사를 지낸다.

이곳 망향대에서는 맨눈으로도 발아래 논과 철책선, 바다 건너 북한 땅이 보인다. 

교동도의 중심인 대룡시장은 북한 이주민들이 생계를 잇기 위해 고향에 있던 연백시장을 본떠 만든 곳이다. 100명 남짓 남은 실향민들은 여전히 대룡시장 인근에 모여 산다. 대룡시장은 50여 년 동안 교동도의 경제 중심이었으나 교동도 인구가 급격히 줄고 쇠락하면서 시장의 규모도 크게 줄었다.

교동대교 개통 이후 1960∼1970년대에서 시간이 멈춘 듯한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늘면서 새 단장을 했다. 골목 곳곳에 향수를 자극하는 벽화가 그려졌고, 옛날 교복을 빌려 입고 흑백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진관 등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상점들이 들어섰다.

대룡시장 옆 관광 안내소인 교동 제비집은 첨단 ICT(정보통신기술) 시설을 갖추고 관광객을 맞는다. 민관이 함께 추진하는 ‘평화와 통일의 섬 교동도’ 프로젝트의 하나로 지난해 3월 문을 열었다.

터치스크린이나 360도 가상현실(VR) 영상을 통해 교동도 구석구석을 찾아볼 수 있고, CCTV에 녹화된 황해도 지역 모습을 초대형 화면으로 볼 수 있다. 교동도와 북한의 연백평야를 잇는 가상의 다리를 만들거나 자신의 이름과 얼굴이 들어간 교동신문 만들기 등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된다. 자전거 대여와 지역 농특산품 판매도 하고 있다.

‘시간이 멈춘 곳’이었던 교동도의 변신은 계속된다. 섬을 한 바퀴 도는 평화자전거길이 만들어진 데 이어 화개산~고구 저수지~서한 습지를 잇는 관광 코스가 개발되고 있다.

성수목 기자

이전화면맨위로

확대 l 축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