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나랏님도 구제 못한다’는 말이 있다. 남의 가난한 살림을 도와 주기는 한도 끝도 없어서 개인은 물론 나라의 힘으로도 구제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이면 누구나 공평한 대우를 받고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기본권리가 있다.
따라서 최대한 공평하게 소득분배가 이뤄지도록 국가가 정책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정치의 궁극적 목적이고 사회가 추구하는 정의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자유경쟁 시장경제체제 하에서는 경제성장 결실의 완전 평등한 분배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런 '풍요속의 빈곤'같은 계층간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절대 빈곤층을 지원하는 정책적 노력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소외되는 계층이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소외계층(The Marginalized class)이란 경제성장의 소득분배 과정에서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약자, 일반적으로 넓은 의미의 취약계층을 말한다. 국가의 공공개입을 통하지 않는 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평등한 혜택을 제공받을 기회가 배제되기 쉬운 계층이다. 이들은 심리적 소외감과 박탈감의 정도가 심할 뿐 아니라 실제로 형평성이 결여된 불리한 대우를 받는 경우도 많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 여름 한 달간 강북구 삼양동에서 ‘현장 시장실’, 소위 옥탑방 생활을 했었다. 보여 주기식 단기간 이벤트라는 비난도 있었지만, 취약 소외계층에 관심을 갖고 그들과 함께 한다는 신호를 보낸 점은 좋은 발상이라고 본다.
그러나 좀 더 실질적이고 장기간에 걸쳐 정례화된 이런 만남의 장을 마련하면 어떨까. 그들과 소통하고 실제현장에서 문제점을 피부로 느껴 볼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다. 특히 이들이 사회공동체에서 버림받았다는 자멸감에서 벗어나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참여의식, 자신의 위치와 존재감을 당당히 느낄 수 있게 도와야 한다.
그들은 주로 소득, 질병, 주거, 교육의 4대 분야에서 소외되어 지원을 받고있다. 특히 교육분야의 지원은 그들에겐 미래가 없다는 절망감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사다리라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반세기 전 우리의 가난한 농부들이 소팔고 논팔아 자식을 대학 보냈었다. 가난의 대물림을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교육을 통하면 자녀세대에서는 의젓한 사회 공동체 일원으로 올라설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기때문이다.
이러한 교육적 소외계층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지원방안을 고려해 보자.
1. 항상 비리와 학대문제로 시끄럽고 비싼 사립대신 무료 국공립 유치원 설립지원 법제화
2. 학습 부진학생 전용 보충수업 특별교재와 프로그램 개발지원
3. 잠재력이 있는 자녀들을 위한 학습몰입용 프로그램 개발지원
4. 국비장학 대학생들의 재능기부와 지역 아동센터의 멘토로 주선하는 방안이다.
교육지원 사업은 미래희망에의 투자임을 감안할 때 수급자의 자격을 더 완화해서 지원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생계, 주거, 질병에 대한 지원은 냉정히 말하면 현상유지나 더 악화예방을 위한 목적일 뿐이다.
구리 료헤이(栗良平)가 쓴 일본 베스트셀러 단편소설 '우동 한 그릇'이 있다. 매년 년말이면 찾아오는 가난하고 소외된 세 모자에게 우동집 주인은 우동 한 덩어리를 몰래 더 넣어 주며, 그들이 성장하여 휼륭한 사회인으로 복귀되기까지 ‘계층간 사다리’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가슴 찡한 스토리다.
우리는 얼마 전 계층간 소득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다는 통계를 내놓자, 현정부의 소득주도 경제성장 정책에 배치된다는 황당한 이유로 통계청장을 경질했다. 저소득층에 눈감고 버리고 가겠다는 의지인지 심히 우려된다.
한 쪽방촌에서 취약 소외계층의 구제활동을 하고 있는 어느 목사의 말이 생각난다.
“우리의 자본주의 사회가 누군가를 밟고 일어서야 내가 올라 갈 수있는 구조라면, 우리는 당신들이 일어서도록 밟혀 주고 뒤로 밀려나 주었다. 이제는 당신들이 나서서 밑에 뒤쳐져 있는 우리들의 손을 잡아 끌어올려 줄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