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페루자’의 실제 주인공 페루자, 영화제 참석차 방한, 아프리카 오지서 한국방송 보며 한국말 익혀
“한국을 정말 좋아해서 무조건 죽기 전에는 한국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영화 덕분에 한국에 오게 됐죠. 꿈을 가지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 같아요. 그리고 불가능은 없는 것 같아요.”
에티오피아에서 온 소녀는 한국말로 또박또박 자신의 꿈과 고민을 이야기했다. 히잡을 두른 채 초롱초롱한 눈을 반짝이는 이 소녀는 서울배리어프리영화제의 초청으로 방한한 페루자 무함마드 아브라함 양이다.
페루자는 김영근·김예영 부부 감독이 연출한 단편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페루자'의 실제 주인공이다. 9일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페루자와 김영근·김예영 감독을 만났다.
김영근·김예영 감독은 2014년 여름 에티오피아 여행 중 작은 마을의 게스트하우스에서 페루자를 처음 봤다. 당시 중학교 졸업반이던 페루자는 두 사람을 여러 번 놀라게 했다. 두 사람은 “안녕하세요. 오시느라 고생 많았죠?”라고 인사하는 페루자를 처음 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에티오피아의 주소도 없는 오지 마을에서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소녀를 만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페루자는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엄마와 새 아빠를 돕던 중 6년 전 게스트하우스에 TV가 생기면서 한국방송을 접하게 됐다고 한다. 처음 관심이 간 프로그램은 배우 이민호가 출연한 ‘꽃보다 남자’였다고.
이후 ‘1박 2일’ ‘해피 투게더’ ‘개그 콘서트’ 등 예능 프로그램을 접하면서 말문이 트였고, 언젠가 한국에 갈 것을 꿈꾸게 됐다.
“다른 나라 방송에선 주로 영화가 나왔는데 한국방송에서는 연예인이 많이 나왔고, 매일 새로운 내용을 방송하는 게 재미있었어요. 또 한국 사람이 사는 모습이 재미있어 보였죠.”
페루자가 두 사람을 놀라게 한 것은 한국말 실력만이 아니었다. 페루자는 TV만으로 5개국어를 익힌 아이였다. 그러나 에티오피아 시골에 남아있던 조혼 풍습에 따라 중학교를 마치면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시집가야 하는 처지였다.
페루자가 한국방송에 빠져들고 한국에 가길 꿈꾼 이유는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자유롭게 꿈을 펼치며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기회도, 정보도 없는 그곳에서는 한국방송만이 탈출구였다.
“그때는 정말 너무 싫었어요. 다른 여자들이 일찍 결혼해 아이를 낳고 완전히 다르게 사는 것을 봤으니까요. ‘왜 그렇게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너무 억울했죠.”
페루자 처지를 알게 된 두 사람은 남은 여행 일정을 중단하고 페루자와 함께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로 향했다. 페루자의 집에서 버스를 타고 이틀을 가야 하는 거리였다.
두 사람은 한국 대사관을 방문하고 현지의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와 한국국제협력단(KOICA)에 페루자를 소개했다. 코이카에서는 입사면접까지 봤지만 취업은 하지 못했다. 취업 연령보다 어린 데다 대학 졸업장이 필요한 때문이었다.
소득 없이 페루자의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페루자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아이라고 부모를 설득했다. 하지만 페루자의 새 아빠는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결국 두 사람은 한가득 근심·걱정을 안고 귀국해야 했다.
김예영 감독은 “당시만 해도 이 친구의 앞날을 기약할 수 없었고 우리가 떠나는 순간 시집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며 “정말 똑똑한 친구인데 너무나 안타까웠고 절망적이었다”고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두 사람이 한국으로 돌아오고 6개월 후. 페루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두 사람 덕분에 부모님이 시집을 보내지 않았고, 고등학교에도 진학했다는 소식이었다. 두 사람은 페루자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페루자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면 영화제에서 상영될 수 있지 않을까? 운이 좋으면 페루자도 영화제에 초청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페루자에게서 고등학교에 갔다는 연락이 왔죠. 이왕 시작했으니 더 잘 만들어서 꼭 페루자를 한국에 오게 하자고 결심했어요.”
두 사람은 2017년 1월 단편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페루자’를 완성했다. 그해 ‘페루자’는 울주세계산악영화제, 서울여성인권영화제, 인디애니페스티벌의 3개 영화제에서 선택받았고, 울주산악영화제는 페루자를 게스트로 초청했다.
‘죽기 전에 한국을 가보고 싶다’던 페루자의 꿈과 ‘운이 좋으면 페루자를 초청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기대한 김영근·김예영 감독의 꿈이 이뤄진 순간이었다.
한국에 온 페루자는 서울 압구정CGV에서 ‘페루자’를 처음 봤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간 영화관이었고, 영화관에서 처음 본 영화가 자신의 이야기였다.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때만이 아니고 지금도 ‘페루자’를 보면 많이 울어요. 두 분을 만난 기억, 그때의 행복이 떠올라서요. 두 분을 만나기 전에는 집안일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분들이 오면서 저도 다른 세상을 보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 시간이 없었으면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었을지 생각하면 눈물이 떨어져요.”
페루자는 현재 에티오피아 사마라 대학 영문과 1학년 학생이다. 지난 학기에 모든 과목에서 A 학점을 받았다고 한다. 내심 한국교환학생을 꿈꾸고 있지만, 지난해 한국에 온 후 오히려 만만치 않은 현실에 눈을 뜨게 됐다.
“예전에는 항상 머릿속에 한국만 있었으니까 한국에 가면 뭘 하든 행복할 것 같았어요. 지금도 물론 한국에서 살아보고 싶죠. 그런데 작년에 와보니 여기서 사는 게 쉬운 일이 아닐 것 같더라고요. 경제적인 생각을 많이 해야 하니까요. 한국에 오려면 정말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난해 한국에 왔을 때 김영근·김예영 감독이 항상 페루자와 함께 다녔지만 이번에는 페루자 혼자 서울 시내를 다녔다고 한다. 지하철은 물론 에스컬레이터도 처음 타봤다고. 광화문 교보문고에서는 영어 전공 서적과 한국어책을 샀다고 한다.
“작년에 돌아가면서 다시 오기가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더 공부하고 스스로 일해서 와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1년 만에 다시 올지는 몰랐어요. 정말 감사하죠. 제가 이런 대접을 받을만한 사람인가 싶기도 하고요. 돌아가면 저를 입증해서 스스로 한국에 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