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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만족에 대하여

하림산책 58호 - 박하림(수필가/전 (주) 휴비츠 고문)
인간의 만족은 끝이 없다고들 말한다. 하여 그런 속성을 이렇게 비유한다. 
말이 없어 걸어 다니던 사람이 말을 타면 웬 호사인가 팔자가 편 게 감사한 마음은 잠시이고 종을 두어 경마를 잡히게 해야 말 탄 위세가 만족하게 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사람은 늘 만족에 허기져서 불만하게 되면 자신서부터 부모나 남을 원망하고 심지어 그 불만족을 자신의 운명이나 하느님에다 쏟아 원망한다.

만족이란 인간의 한없는 욕망이 바라는 것으로 결코 꿈꾸는 것처럼 결실되지 않는 것이다. 세상일은 불만족스러운 게 더 많다. 그건 이상이 현실보다 더 허황되기 때문이고 너무 많은 만족을 바라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루크레티우스는 만족하게 사는 마음가짐에 대해 저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만일 사람이 참된 원리로써 자기 일생을 안내하고자 한다면 인간의 가장 큰 재산은 적은 것에 만족하며 사는 것이다.

적은 것은 결코 모자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적은 것에 만족한다는 것은 자기 삶에 대해 겸손하다는 의미이며 삶의 신조가 안분지족安分知足하여 산다는 의미다. 

자기 분수에 맞게 사는 걸 만족하게 여긴다면 그는 행복한 것이다. 언제나 자기 분수에 넘치고 제 깜냥에 버거운 욕망에 매달리는 데서 불만족이 생기고 불행이 싹트는 것이다. 

중국 한나라시절 도가사상을 중심으로 지은 책 《회남자 淮南子》에서는 만족한 삶에 대해 ‘자기를 아는 자는 남을 원망치 않고 천명을 아는 자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는다. 복도 자기에게서 싹트고 화도 자기로부터 나오는 것이다.’라고 했다. 인생이란 자기 감장에 맞게 자기 감장대로 살아야 만족한 삶이 되지 감장하기 어려운 욕망을 따라 꿈을 꾸게 되면 만족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런데 사람이 적은 것에 만족하며 산다는 게 결코 쉽지 않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을수록 더 좋다는 만족의 수위는 어디까지나 상향성이다. 해서 서슴없이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 한다. 그러나 그런 식의 욕망과 만족의 멈출 줄 모르는 확대 때문에 오이려 비극적 최후를 맞은 사례는 너무나도 많다.

끝없는 정복욕의 만족을 위해 멈출 줄 모른 채 그저 패권지향 진군만 하던 알렉산더대왕은 허무하게 요절했다. 그가 누린 만족의 월계관은 ‘위대한 정복자’라는 칭호뿐이었다.  

제후라는 자리를 낮다 불만하여 한신은 논공행상에 만족하지 못한 채 앙앙불락하다 결국 죽임을 당했고 초나라는 망했는데, 일등공신임에도 검소한 생활에 만족하여 군사軍師의 자리를 지킨 제갈공명은 만인의 존경과 애도 속에 일생을 마감했다.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12제자는 장차 천국의 보석 같은 존재로 살 축복 받은 사도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유다는 재정을 담당할 정도로 그 실력을 인정받고 신임을 받았다. 그런데 뭔가 채워지지 않는 세속적인 욕망에 이끌렸던지 그는 은자 기십 냥에 예수를 팔아 넘겼다.

그가 그 대가로 잃은 것은 아무나 앉을 수 없는 제자 자리, 천국, 신앙 등 이루다 헤아릴 수 없는 가치였다.
보릿고개를 넘기며 애면글면 살아본 호호야들에 비해 월등히 잘 먹고 잘 사는 세대는 삶의 만족도에 있어서는 훨씬 떨어진다. 분수에 맞지 않게 원하는 거 다 하려는 욕망 때문이며 경박한 불만 때문이다.  
 적은 것에 만족하여 산다는 것은 그냥 마음먹기로 되는 게 아니고 부단한 수신과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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