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경술국치로 주권을 상실한 한국인들은 그해 3월 1일 일제히 거리로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쳤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임시정부가 국내외에서 잇따라 만들어졌다.
비록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이 자주독립이라는 결실로 곧바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일제는 식민지배에 집단 반발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통치 방식을 온건하게 바꾸고 유화 정책을 펼쳤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이미 1919년 이전에도 혼란스러웠다. 가장 큰 사건은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이다.
이와는 별개로 일제 무단통치는 점점 가혹해졌다. 한국근현대사학회가 엮은 ‘한국 독립운동사 강의’에 따르면 한반도에 배치한 헌병은 1910년 653개소, 2천19명에서 1918년 1천48개소, 8천54명으로 대폭 늘었다. 경찰도 같은 기간에 481개소, 5천881명에서 738개소, 6천287명으로 증가했다.
일제는 민족산업 발전을 가로막고 식민지 수탈을 강화하는 조처를 잇달아 단행했다. 일례가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재정 확보와 세원 조사, 일본인의 한국 토지 점유를 위해 진행한 토지조사사업이다. 이로 인해 농지는 두 배 가까이 확대됐으나, 조선총독부는 곳곳에 있는 토지를 무상 취득하면서 단번에 국내 최대지주로 부상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9년 1월 21일 조선 마지막 임금이자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이 덕수궁에서 숨을 거뒀다. 3·1운동은 이처럼 복잡한 국내외 정국과 맞물려 한국인들이 그간 표출하지 않은 밑바닥의 분노와 열망이 일순간에 폭발한 대사건이었다.
도면회 대전대 교수는 학술지 ‘역사와현실’에 게재한 논문 ‘3·1운동 원인론에 관한 성찰과 제언’에서 3·1운동 배경으로 세 가지를 꼽았다. 도 교수는 “구조적으로는 조선인에 대한 민족적 차별, 조선을 일본 통치에 적합하게 바꾸기 위해 강행한 근대적 제도와 법령으로 축적된 분노가 밑바탕에 깔렸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쌀값 폭등으로 부를 축적한 지주층과 다수 민중의 지지를 확보한 종교 지도자의 정치적 부상 욕구가 존재했고, 민족 독립을 촉발하는 국제정세가 형성됐다”며 “이러한 요소들이 상호 작용해 대규모 민중 봉기가 발생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