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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돼지띠 기해년에 근심은 사라지고 만복만 깃들기를

천간(天干)이 ‘기(己)’이고 지지(地支)가 ‘해(亥)’인 해. 육십갑자(六十甲子)로 헤아리면, 서른여섯 번째 해이다

12띠 중 열두 번째 띠로 해년 생(亥年生)을 가리킨다.
기(己) ‘황금색’ ‘해(亥)’는 돼지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2019년은 황금돼지띠가 되는 것이다.

과거부터 돼지는 풍요와 다산을 상징한다고 알려져 왔는데 특히 황금돼지해에 태어난 아이들은 재물운이 좋다는 옛말도 있다.

시(亥時)는 오후 9시부터 오후 11시까지, 방위는 북북서(北北西), 달은 가을 10월, 계절은 10월 입동에서 11월 대설 전날까지, 오행은 수(水), 음양은 음(陰), 대응하는 서양별자리는 전갈좌에 해당한다.

돼지띠 생은 정직하고 솔직, 단순하며 아주 강인하다. 침착하고 이해심 있는 돼지띠 생을 친구들의 잘못들을 용서할 수 있는 성실하고 선량한 사람이다. 재산을 훌륭하게 사용하며 사회활동과 자선사업을 좋아하는데 이것은 그가 동정심이 강하기 때문이다.

돼지띠 생은 겉으로 보기에 속이기 쉬워 보이지만 생각보다 영리하다. 

그러나 매사에 망설이는 점이 발전에 장애가 된다. 그의 주요한 결점은 자신이나 가족 친구들에게 단호히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말은 적은 편이지만 일단 입을 벌렸다 하면, 말이 많고 기고만장하여 남의 오해를 받기도 한다.

차례, 세배는 이렇게, 가래떡의 유래는
차례를 마치고 자리를 정리해 앉아 할아버지·할머니·부모·친척·형제 등에게 차례로 새해 첫인사를 드리는데, 이를 세배라고 한다. 
사당을 모신 집은 먼저 사당에 절을 한 다음 세배를 드리며, 세배가 끝나면 차례 지낸 세찬과 떡국을 아침으로 먹는다. 세배를 받는 집에서는 어른에게는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아이에게는 과일과 세뱃돈을 주며 정담을 나눈다. 친척 어른이 먼 곳에서 살면 수십 리 길을 찾아가서라도 세배를 드리는 것이 예의이다. 먼 곳에는 정월 15일까지 찾아가서 세배하면 예의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자 절하는 법
1. 손과 팔꿈치가 수평이 되도록 어깨 높이로 들고 고개를 숙인다.(오른손등이 왼손등 위로 가도록 포갠다) 
2. 포갠 양 손 사이로 시선은 바닥을 향한다. 
3. 먼저 왼발을 구부린 뒤 오른발을 구부린 후 오른발을 아래가 되게 발등을 포갠 후, 엉덩이를 내려 깊이 앉는다 
4. 윗몸을 45도 앞으로 반쯤 구부려 절한다. 

남자 절하는 법
1. 양손을 포개 양 팔꿈치와 손이 배 부근에서 수평이 되게 한다.(이때 남자는 왼손이 오른손 위로 올라간다) 
2. 허리를 굽혀 손으로 땅을 짚고 왼발을 먼저 구부린다. 
3. 오른발을 구부려 왼발 바닥위에 오른발을 포개 앉는다. 
4. 엉덩이를 발에 붙이고 손을 구부려 양 팔꿈치가 땅에 닿은 상태에서 얼굴이 손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굽혀 절한다.

가래떡의 가래는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그에 대해 알아보기 위한 두가지 이야기가 있다.
원래 가래라는 단어는 떡이나 엿을 둥글고 길게 늘어뜨린 토막이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가래떡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 첫번째 유래다.

두번째는 농기구 가래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설이다. 
농기구 가래는 삽날두쪽에 새끼로 꼬아 논 줄을 매달아서 흙을 파는 기구를 말하는데, 여기서 새끼줄의 이름이 가래 줄이라고 하고 이 가래줄을 만들기 위해서는 새끼를 꼬는 것처럼 손으로 비벼 길게 만들기 때문에 가래떡이 이와 같아서 이름 지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왜 떡국과 가래떡을 최대의 명절 설날에 먹는 것일까? 
가래는 길게 늘어진 것처럼 생명이 길어진다고 여겼기 때문에 새해를 맞이한 날, 가족들 모두가 오래 살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떡국을 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또한, 가래떡의 희고 잡티 하나 섞이지 않은 떡처럼 한해를 밝게 보내라는 의미와 백색의 떡과 국물을 먹으면서 지난 날의 안 좋은 과거는 잊고 새해는 밝고 좋은 일만 생기라는 뜻도 담고 있다고 한다. 

또한, 가래떡이 흰쌀로 만들어져서 양이 기운을 상징하여, 음의 기운이 가득한 겨울에 양의 기운을 가진 가래떡을 먹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윷놀이 알고 즐겨요
윷놀이와 관련하여 가장 오래된 자료는 중국의 『북사(北史)』와 『태평어람(太平御覽)』인데, 여기에는 부여에 저포(樗蒲)와 악삭(握?) 등의 잡희(雜戱)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고구려·백제·신라에도 윷놀이가 전승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므로 윷놀이의 기원은 삼국 시대 이전으로 소급될 수 있다.

이후 고려 시대 말 이전에 현행 윷판과 같은 것이 쓰이면서 시(詩)에 등장할 정도로 성행하였으며, 조선 시대에는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될 정도로 크게 성행했다.

윷놀이는 정월의 마을 축제로서 남녀노소 구분 없이 누구나 놀이를 한다. 윷놀이는 재미로도 하지만 농경 사회에 풍년 농사를 기원하는 소망이 담겨 있다. 윷판은 농토고, 윷말은 놀이꾼이 윷을 던져 나온 윷패에 따라 움직이는 계절의 변화를 상징해 풍년을 가져온다고 여겼기 때문에 윷놀이를 하면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이와 함께 윷을 가지고 점을 치는 윷점도 있다. 즉 정초에 윷을 가지고 그해의 길흉이나 농사에 대해서 점을 쳤는데, 이것을 사점(柶占)이라고도 한다.

윷놀이의 유래나 기원에 대해서는 다음 몇 가지 설이 전해진다. 
첫째는 부여족 시대에 다섯 가지 가축[도는 돼지, 개는 개, 걸은 양, 윷은 소, 모는 말]을 다섯 마을에 나누어 주고, 그 가축들을 경쟁적으로 번식시킬 목적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둘째는 삼국시대에 생겼다는 민간 전설이다. 셋째는 옛날 어느 장수가 적과 대진 중에 적군의 야습을 경계하여 진중의 병사들의 잠을 막기 위하여 이 놀이를 창안하였다는 설도 있다.
이선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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