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가을 넷째 여동생이 우리 집 곁으로 이사를 왔다.
노년에 가장 좋은 친구는 같이 늙어 가는 여형제인가 한다. 그 동안 나름대로 남의 집에 가서 맞추면서 살다보니 많은 부분 달라져 있는 모습들이다. 허나 어릴 때 같이 지지고 볶고 살았던 추억만큼은 언제나 똑 같은 얘기로 그저 재밌고 신난다.
때론 예상치 않은 맑은 대낮에 갑자기 돌개바람이 일어나 우박과 소나기가 한바탕 순식간에 휩쓸고 간 후 어수선한 거리에 금방 햇빛이 쏟아져 내릴 때가 있다. 마치 어린 날 우리 집 풍경과 흡사한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육남매로 자란 우리들은 언제나 시끌벅적 시장 통 속 같았다. 초저녁잠이 많은 형제들은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저녁도 못 먹고 자고선 새벽이면 일어나 찬밥을 볶아먹기도 하고, 김치죽을 끓여 먹기도 했다.
동짓날이면 팥죽을 몇 동이씩 쑤어서 옹기항아리에 담아 놓았다.
새벽이면 일어나 시끌벅적 언 팥죽을 동이 째 들고 들어 와서 얼음이 둥둥 뜬 동치미 국물과 함께 덜덜 떨면서 서로 먹겠다고 싸우며 먹던 그 팥죽 맛은 평생을 두고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맏딸인 나는, 가마솥이 걸린 부뚜막에 올라앉아서 팥죽을 젖느라고 애썼던 팔뚝 힘이 아마 지금도 남아 있지 않았을까 한다.
또한 감을 한가마니씩 따다가 칡 나무 넝쿨로 만든 넓적한 바구니에 켜켜로 담아서 시렁에 올려 두면 연시가 된 것부터 먼저 골라 먹느라 형제들끼리 새벽마다 투전장 같이 야단법석을 떨기도 했다. 때론 어린 동생들은 까치발로 더듬다가 홍시바구니를 뒤집어쓰고 나가 떨어져 범벅이 되기도 했다.
무슨 날이라도 되면 팥 시루떡을 한말씩 해도 모자랐다.
여섯 남매나 되다가 보니까, 아이들 성격도 재각기다.
욕심을 내어서 배탈이 나도록 먹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심부름하기를 좋아해서 이웃집 떡 돌리기를 하는 아이도 있고, 놀기를 좋아해서 먹을 시간은 없고 나중에 먹으려고 아무데나 쑤셔 박아 두었다가 까맣게 잊어먹는 아이도 있다.
때로는 이불장 속에서 서랍 속에서 돌덩이가 된 떡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 시절 간식꺼리로는 최고인 쌀을, 한 자루 튀겨오면 그 자리에서 없어지기도 한다. 중학교 다닐 때 인 것 같다.
한 번은 내 몫으로 한바가지 떠서 다락에 넣어 두었는데, 동생들이 빼앗아 먹을 까봐 컴컴한 다락에 문 닫아 놓고 몰래 먹다가 바닥에 흩어진 것이 쌀 튀밥인 줄 알고 손으로 쓸어서 털어 넣고 씹다가 보니까 맛이 이상하여 뛰어내려 문을 활짝 열고 보니 쥐똥을 한 움큼 털어 넣고 씹은 것이다.
밖으로 뛰쳐나가서 손가락을 집어넣고 꽥꽥거리면서 토하고 칫솔질을 하고 법석을 떨면서 징징 울고 날뛰든 생각을 하니 웃음이 절로 난다.
어린 시절엔 형제들과 사촌들과도 한데 어울려 뒹굴었다.
한번 어울렸다하면 헤어지기 싫어서 눈물을 찍어내기도 했었다.
나는 어디 놀러 라도 갈라치면 낌새를 챈 남동생은 치마꼬리를 붙들고 졸졸 따라 다렸다. 혹시라도 몰래 갔다 오면 눈물 콧물 범벅을 하고선 우는 통에 난감 할 때가 많았다.
어린 동생들은 귀찮을 정도로 따라 다니고 싶어 해서 따돌리고 울타리 밑으로 몰래 기어 다녔었는데, 그 동안은 같은 서울에서 살면서도 살기가 바빠서인지 만나기도 어려웠었는데 어느 사이 세월은 유수 같이 흘러서 어느덧 동생들의 머리에도 이슬이 내렸고, 모두가 다 세대교체가 되어버렸다.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쓸쓸함을 느끼고 있을 때에 맞추기라도 하듯, 집안의 총무역할을 하는 넷째가 내 옆에 왔으니 든든하기 그지없으며 모두 자주 만나게 되어서 좋다.
동짓날 절에 다니는 동생들이 절에 간다기에 팥죽 좀 얻어 오라고 하였더니, 갔다 와서 그렇게 맛없는 팥죽은 처음 먹어 보았다며, 옛날 엄마가 쑤어 주었던 팥죽 생각이 절로 난다고 해서, 며칠 뒤 내가 팥죽을 쑤어서 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더니만, 언니가 쑤어준 팥죽이 엄마의 팥죽이랑 똑 같다며 모처럼 희희낙락(喜喜樂樂) 어린 날의 추억에 젖어 들었다.
가끔 팥죽이나 쑤어서 동생들을 불어 모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리운 엄마를 그려 보았다.
작가소개 - 반 윤 희(화가/수필가)
1998년 한맥문학 신인상 등단
2009년 시조사 출판 100주년
기념 작품공모전 최우수상
한국 문인협회회원
현 중랑 작가회 부회장
본지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