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는 인류 역사에서 사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중요한 가축이다. 사람에게 꼭 필요한 단백질 공급원의 역할은 물론이고, 풍요와 다복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돼지꿈’을 꾸면 복이 깃든다고 해서 복권을 사는 풍습이 있다.
사실 돼지의 쓰임새는 식품, 화장품에서부터 인공판막 등의 의료용품에 이르기까지 무궁무진하다.
사람에게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주는 셈이다. 여기에 더해 요즘은 사람의 질병을 치료하는 데도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
무엇보다 돼지의 장기를 떼어 내 사람의 고장 난 장기를 대체하는 ‘이종(異種) 이식’이 임상시험을 목전에 두고 있다.
돼지의 장기를 사람에게 이식하려는 건 장기이식 대기자 수가 매년 증가하는 데 반해 이식에 필요한 장기는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2017년 기준으로 보면 우리나라의 장기이식 대기자는 3만명이고, 이에 필요한 뇌사자 장기기증은 연간 500명 정도다.
이런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의과학자들은 사람의 장기와 크기가 비슷하게 만든 무균미니돼지에 눈을 놀리고 있다. 이들 돼지를 대량으로 키워뒀다가 필요할 때 사람의 장기이식 치료에 쓰겠다는 것이다.
물론 걸림돌이 없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 면역거부반응이 가장 큰 문제다. 면역거부반응은 다른 동물 또는 타인의 장기가 이식될 때 이를 바이러스와 같은 침입자로 여기고 공격하는 우리 인체의 면역시스템을 말한다. 더욱이 이종간 이식의 경우 사람간 이식보다 면역거부반응이 더 크다.
다행히도 그동안 연구가 거듭된 끝에 최근에는 이런 면역거부 반응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이제 사람에게도 임상시험이 가능할 정도가 됐다는 게 관련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현재까지 이종간 장기이식에 가장 근접한 질환은 ‘1형 당뇨병’이다.
1형 당뇨병은 췌장에서 인슐린이 분비되지 않아 혈당 조절이 되지 않는 질환으로, 이를 관장하는 췌도를 이식하는 게 가장 근본적인 치료법으로 꼽힌다.
하지만 사람간 이식의 경우 2∼4명의 췌도를 분리해야 겨우 1명에게 이식할 수 있을 정도여서 아직 시도조차 된 적이 없다. 이 때문에 현재로서는 돼지의 췌도를 이식하는 게 유일한 대안으로 꼽힌다.
국내에서는 바이오이종장기개발사업단(단장 박정규 서울의대 교수)이 당뇨병 원숭이에 돼지의 췌도를 이식하는 영장류 실험을 성공적으로 마친 데 이어 올해 중으로 세계 첫 임상시험에 들어간다는 계획이다.
돼지의 췌도를 이식받은 당뇨병 원숭이가 3년 가까이 정상 혈당을 유지하며 건강하게 생존한 만큼 같은 영장류인 사람에서도 이런 치료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연구팀은 기대하고 있다.
연구팀은 췌도 이식에 앞서 돼지의 각막을 각막 이상으로 실명한 환자에게 이식하는 임상시험도 검토 중이다. 이 또한 췌도 이식과 마찬가지로 돼지 각막을 이식받은 원숭이가 1년 이상 면역억제제 없이 정상기능을 유지했다는 동물실험 결과에 따른 것이다.
각막 이식은 이르면 올해 상반기 중에 가능하다는 게 연구팀의 설명이다.
박정규 단장은 “그동안 이종이식 임상시험을 시행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했던 문제들이 복지부, 식품의약품안전처 등과의 협의로 상당 부분 해소됐다”면서 “다만, 임상시험 2년이 지난 이후의 환자들을 지속해서 추적 관찰하는 부분만 국가가 맡도록 제도가 마련된다면 이종이식 연구는 더 앞서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