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란 영혼처럼 우리 삶의 보이지 않는 흐름으로 그 정의가 물리적 기준에서 철학적 기준에 걸쳐 매우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 삶에 그것만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게 없으며 그것처럼 친근하면서도 다루기 어려운 존재도 없다.
또한 시간을 정의하기가 보통 어렵지 않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는 빠르기의 무한연속 흐름이라고 한 정의가 어쩐지 미흡하다. 아마도 우리가 감각적으로 느끼는 것이나 시간개념이나 자연스러운 시간에 대한 느낌과 인식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시간이 우리 생활이나 일생에 있어 매우 중요한 존재요 역할을 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공기에 대한 의식처럼 변함없이 소유하고 쓸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인즉슨 시간처럼 통제할 수 없고 인간 마음대로 소유하고 쓸 수 없는 것도 없다. 명줄이 짧으니 기니 하는 수명만 해도 시간의 길이를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시간의 철학적 정의를 보면 신의 영역에서 인간세상으로 보낸 운명의 실타래 같은 생각이 든다. 시간의 본질이 얼마나 신비한가는 그것을 표현하는 용어를 보면 알 수 있다. 불교에서 시간을 찰나(刹那 Ksana) 순간이라고 하는데 순간이란 눈 깜짝할 사이를 뜻한다. 또 어떤 시인은 문틈을 말이 휙 하고 지나가는 시간이락 했는데
그런 맥리에서 길고긴 시간을 ‘겁 劫’이라고 한다. 천국에서는 천 년이 하루 같다고 하며 불가에서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인연이 5백 겁 만에 이뤄진다 했으니 시간의 현묘함을 알기 지난하다.
때문인가 시간에 대한 인식도 단순하지 않다. 누군가 인간은 시간의 종이며 인생이란 시간 열차를 타고 하는 여행이라고 했다. 그런가하면 다른 이는 인간이 시간의 주인으로 일생이라는 시간 열차를 스스로 운전해 간다고 했다.
사람이 시간의 주인이든 종이든 분명한 사실은 하루라는 24시간을 어김없이 달리는 시간 열차를 타기 위해 우린 그 역두에 선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24시간을 산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때 사람들의 시간에 대한 철학이 다르다.
아네모필스anemophiles, 미래형 인간의 인식은 시간을 무한한 것으로 믿고 과거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미래에 쓸 시간은 무한히 많은 것, 이미 써버려 과거에 묻힌 시간은 무가치한 것,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시간을 소비품 정도로 여기는 것이다. 과거의 나의 시간에 무엇을 하였던 가를 무시하고 아무런 의의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미래에 쓸 시간이 무한하다고 믿는 건 영생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불교에서는 죽음과 동시에 그의 시간을 포함한 모든 것이 공(空), 즉 무로 멸실될 뿐이라고 했다. 반면에 기독교에선 부활로 영생이라는 시간을 다시 누리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그처럼 과거시간의 맥리에 현재시간의 존재가치가 연결돼 있음을 간과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인식이다. 그리고 그 현재시간의 뿌리가 뻗어 미래시간으로 꽃핀다는 사실을 대수롭잖게 여기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크로니스트chronists, 과거지향형 인간은 시간이란 낭비해서는 안 되는 신의 선물이라며 과거만 믿는다. 현재시간은 과거시간의 뿌리에서 생겨난 것이며 미래시간은 너무나 불확실해서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언제 시간과의 단절이 일어나 그 시간을 기초로 세운 모든 꿈과 계획과 목표, 심지어 약속까지도 무산될지 모르므로 확실한 것은 과거시간의 업적과 역사뿐이라는 것이다. 그 과거시간이라는 게 놀랍게도 방금 지나간 시간이다.
시간의 인식에 있어 미래형 인간은 현실감이 너무 박약해 시간의 주인 노릇을 하기가 어렵다. 시간이 무한하다는 인식이 자신의 시간에 대한 것이라면 그건 대단한 착각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시간이 꽃잎에 맺힌 아침이슬과 같이 허무하게 사라진다는 것을 음미해봐야 할 것이다.
시간을 신이 준 선물로 여겨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과거지향형 인간은 시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하는 것이므로 시간의 주인으로 살 수 있다. 그는 매일 시간 열차를 타되 계획대로 제 시간에 할 것이며 생활할 것이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마디게 쓸 것이며 주인으로 시간을 쓸 수 있음을 감사할 것이다.
시간은 주인으로 사용해야지 그것에 끌려 다녀서는 인간답게 살기 어려운 것이다.
현대인은 이런저런 이상한 병을 앓고 있는데 그중 한 가지가 쿼터리즘 Quoterism 이라는 병이다.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은 한 가지 일에 진지하게 접근해서 집중하지 못해 15분 이상을 버티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향은 요새 풍미하는 사조나 경향, 패러다임과 상통하고 다분히 그것에 기인한다. 우선 그런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의 특징이 있다. 말수가 적다. 어떤 질문도 수초 안에 스마트폰에서 해답을 알 수 있으므로 대화 성 질문이 필요 없는 것이다.
그나마 말도 컴퓨터 신조 언어 때문에 이상하게 축약 되었다. 모든 금융거래를 뱅킹을 통해 처리한다. 육필 편지는 이 메일이나 전화메시지로 대체되었다. 신문이나 소설, 영화를 간편하고도 원하는 때 휴대한 스마트폰으로 볼 수 있으므로 아날로그적 사고나 배려가 불필요하다. 그 결과 사유하는 인간은 사라지고 기능이 능한 손가락 전성시대가 되었다. ‘클릭문화시대’란 비아냥거리는 정의가 허황되지 않다.
그런대 인터넷정보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필시 갈수록 사유하지 않게 된다. 사색하지 않으니 심미안은 무뎌지고 자성하는 기회는 점점 줄어들게 된다. 자성하지 않으면 자신을 조탁할 수 없으며 그것에 기초한 자애를 할 수 없고 남에 대한 배려를 하 기 어렵게 된다.
몰입하지 못하고 건성건성 눈만 즐거우면 만족한 삶에 길들여지면 창조적 호기심은 메마르고 도전의욕은 약화되며 인내력이 가벼워지기 마련이다. 총체적으로 나약한 인간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급기야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이 없으면 아무것도 재미없고 할 수 없는 ‘IT바보’가 된다.
정서의 변형도 보통 문제가 아니다. 하루 종일 스마트폰 들여다보느라 어머니하고 눈 한 번을 맞추지 않는 아들은 디지털 감옥에 갇힌‘디지털 노예’다.
그러고 보니 쿼터리즘 병이란 시대병이긴 하나 결코 가볍게 여길 병이 아니다. 이 병은 지금 너무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