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를 사랑하던 세계적 유명인사들은 많은 일화를 남겼다. 사람들의 성격이 구구각색이고 그 성격에 따라 골프행태도 각기 다르기 때문에 이야기거리가 만들어 진다.
공통점은 걷기 불편해도 문지방 넘을 힘만 있으면 골프장을 기웃거린다는 점이다.
골프강국 우리나라에서도 예외일 수는 없다. 한국인 최초의 프로권투 WBA WBC 세계챔피언 김기수(1938~1997)선수는 은퇴 후 골프와 사랑에 빠져 필드에서 제 2의 인생을 즐겼다. 권투선수로 보다 골퍼로서의 삶에 더 보람을 느꼈던 것 같다.
그는 명문 한양CC에서 클럽챔피언을 여러해 차지했을 정도로 골프를 잘 쳤다. 그는 노령에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에 의지하게 되었지만 골프에 대한 열정과 라운드에 대한 그리움을 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잔디보호를 위해 페어웨이에 카트진입을 절대 금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에게만 휠체어 진입을 할 수있게 골프장이 특별배려를 해주었다. 그는 휠체어로 페어웨이를 누비며 한 손으로 샷을 하며 라운드를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골프 보급 초기의 원로골퍼이기도한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1901~1987)의 골프사랑도 남달랐다. 당시에는 야간 라운드용 조명시설을 한 골프장은 없었다. 그는 라운드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면 밤낮 가리지 않고 전용 안양CC로 나갔다고 한다.
어두워지면 직원들이 자동차를 몰고 와 전조등으로 코스를 비추게 하고 라운드를 했다. 그는 사망 3주 전 1987년 10월까지도 해질무렵 자동차 라이트에 의지하며 라운드를 즐겼다.
의정부에 가면 꽤 오래 되었고 소나무 조경이 아름다운 명문코스 레이크 우드 골프장(구 로얄GC)이 있다. 1980년 4월 강원도 정선군, 광부들의 시위로 사북읍 전역이 무법천지가 되었던 사북사태가 있었다. 사건의 중심에 있던 동원연탄 사업주 L회장은 시위대에 피랍되어 길거리로 끌려나와 무릎 꿇고 사죄를 하는 치욕을 당했었다.
L회장은 그후 이 골프장을 건설하여 클럽하우스 3층에 거주하며 수시로 가족들과 라운드를 하며 여생을 보냈었다. 그는 거동이 불편해진 노령에도 코스로 나가서 직원들의 부축하에 샷을 하고 이동하며 부인과 함께 골프채를 놓지 않았다.
라운드 후에는 직원들이 휠체어로 사우나로 데려와 목욕을 시켜주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다리에 깁스하고도 골프약속을 지키기 위해 골프장에 나와서 절룩거리며 끝까지 라운드를 하는 대기업 부회장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이런 골퍼는 책임감과 약속이행정신이 투철할 뿐 아니라 못말리는 골프애호가다.
필자는 8년 전 무리한 연속 라운드로 오른쪽 무릎 연골손상을 입고 치료받던 중인데도 험한 산악지형인 하남시 C골프장에서 한겨울 라운드를 하다가 잔디에 미끄러져서 연골 재파열이라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었다. 라운드를 접은 2년 간은 지옥에 온 기분 그대로였다.
다행히 왼쪽 무릎은 건실해서 스윙 스텐스 잡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2년간 연습장에서 숏게임 연습만 집중 할 수 있어서 전화위복이 되었던 것 같다. 시니어 나이에 든 지금도 숏게임이 자신이 있는 건 그 당시의 부상사고의 덕으로 생각된다.
세상에서 가장 진하고 변함 없는 사랑이 골프와의 사랑일 것이다. 남녀간의 사랑은 일정기간이 지나면 좀 식어지기 쉽다. 골프는 한 번 배우면 평생 채를 버리지 않는다.
사정에 의해 잠시 창고에 보관은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꺼내서 사용하게 된다.
이런 골프애호가들이 있었기에 우리나라의 골프산업이 발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세계 LPGA 골프계를 한국낭자 군단이 제패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토대 위에서 가능했다.
골生골死 골프광(golf nuts)들의 마지막 소망은 골프치다가 골프장에서 쓰러져 동반자들에 둘러싸여 임종을 하고 골프장이 내려다 보이는 명당자리에 채와 함께 묻히는 것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아마 이들은 골프장 없는 천국보다 골프장이 있다면 주저없이 지옥을 택할 것이다.
가수 이애란의 히트곡 ‘백세 인생’의 골프버젼에서 마지막 소절에 공감이 간다.
“110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저승에도 골프장이 생기면 간다 전해라.
120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골프장 앞산에 이미 묻혀 있다 전해라.
아리랑 아리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