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에는 불공소리가 이승은 물론 저승에까지 전달되도록 하는 불전사물 佛前四物이 있는데 범종, 법고, 운판, 목어 네 가지다.
범종梵鐘은 불공이 시작됨을 알리고, 법고法鼓는 북을 울려 대중을 깨우치는 소리이고, 운판雲版은 공양을 알리는 소리이며, 목어木魚는 불사 때 내는 소리로 저 모든 사물이 불전에서 내는 소리다.
사물의 소리가 없는 도량이 절이라할 수 없는 것처럼 사물의 소리를 내게 만드는 공이, 북채 등이 업는 사물은 조형물에 불과하다.
세상사 천상천하에 유아독존 식으로 혼자서 하는 일이란 하나도 없으니 어처구니가 없는 맷돌이 쓸모가 없고 사북이 없는 쥘부채가 존재할 수 없으며 탄환이 없는 총이 총이 아닌 것처럼 쇠공이가 없는 쇠북은 절대로 울지 못한다.
세상엔 저마다 소리를 품은 종경鐘磬이 있다. 쇠북이라고도 하는 그건 스스로는 절대로 울지 못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소리를 품고 고고하게 높이 매달려 있어도 소용이 없다. 그 소리가 밖으로 울리려면 쇠공이가 있어 종경을 쳐야 한다. 두드리지 않으면 백 년이고 천 년이고 쇠북은 죽은 듯이 침묵할 것이다.
그건 쇠공이를 만나기 전 침묵하는 동안 세월이 오가며 들려준 노래며 이야기며 애환을 담았다.
불전에 벌어진 야단법석을 보았고, 탐욕이 이해타산을 다투는 난장판도 보았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거짓말과 아부와 기만을 들었으며 중상과 매도와 참소로 백주에 생매장을 하는 폭력도 목격했다.
해서 쌓인 울적한 심사와 분노와 울분을 토해내며 풍경이 떨리도록 울었으면 시원하련만 질정할 줄 아는 쇠공이가 없는 것이다.
만일에 제대로 질정하는 쇠공이를 만나 종경을 실컷 두들긴다면 그것들은 서로 몸을 부딪치면서 지축이 떨리고 우박이 떨어지며 수맥이 터져라 큰소리로 울 것이다. 종경들은 그토록 울지 못하고 생 벙어리로 사는 게 답답한 것이다.
하면 쇠공이는 왜 쇠북을 두드리지 못하는가.
이 시대가 질정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정의롭고 공평하며 인도주의적이기 때문인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에선가?
놀랍게도 바깥세상은 너무나도 소란스러워 소리 분별하가기가 어려우며 저마다 주장할 줄만 알지 귀담아 들으려하지 않으며 그나마 귀는 이롱이 들어 제대로 듣지 못한다. 거기에다 가슴이고 귀고 이기심이 덕지덕지 앉아 남의 하소연, 정당한 이의, 바른 주장, 인간적인 충고에 무관심하다. 쇠북은 고사하고 쇠공이의 존재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이다.
종경이 울지 않으면 나라가 불안하고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 무섭다.
종경소리를 듣지 않는 사람들은 거칠고 살벌하다. 자기성찰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귀가 고소하고 즐거운 멘토링이며 대담은 성황을 이루는데도 쇠공이가 가슴이 뻥 뚫리도록 시원하게 종경을 두드려 그 질정의 파문이 뜨르르하게 퍼지지 않는 게 안타깝다. 그 많은 쇠공이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