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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대화

하림산책 - 박하림(수필가 전 (주) 휴비츠 고문)
옛날에 비해 훨씬 잘 살고 문화생활도 다채롭게 즐기며 사는데도 인간관계는 갈수록 갈등에 시달리고, 소통수단이 다양하게 첨단화 되었는데도 대화가 안 된다 답답해하고 말 같지 않은 말을 개탄하고 질타하는 소리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과거에는 무언의 미소나 손을 흔드는 행동만으로도 통했던 일이 지금은 말싸움에 멱살잡이 다툼으로까지 번지기 일쑤다. 

말의 기능이 퇴보해서인가 아니면 마음이 살벌해져서인가 그 원인이나 배경이 석연치 않다.

어떤 이는 그런 현상을 책을 읽지 않는 탓이라고 하고, 다른 어떤 이는 사람 마음이 황폐화 되어가는 증좌라고 했으며, 또 다른 어떤 이는 현대인의 삶이 긴장과 과민으로 지치기 때문에 여유가 없이 각박하게 돌아가는 탓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수긍이 가는 것은 우리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표현과 묘사를 잘 할 수 있는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회화가 가장 아름답다고는 하지 않으며, 한글의 언어적 예술성이 뛰어남에도 노벨문학상을 타지 못하는 게 대화가 서툴고 거칠며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이 아닌가싶다. 

하다못해 길에서 가벼운 접촉사고가 일어나도 어디 다친 데가 없나 묻는 인간적인 배려는 없이 상대방의 실수라고 단정 짓듯 냅다 소리부터 지르고 나선다. 해서 제 풀에 떠밀린 억지와 어이없어하는 반감이 부딪혀 노상 격투까지 벌어진다. 

그야말로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 첫 한 마디를 아름답게 하는 지성과 인격이 실종된 것이다.
 아무리 읽어도 싫증나지 않는 이런 아름다운 대화가 있다. 
 그런 대화를 나누는 주인공은 물론 사람이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칼이 되고 독이 되고 저주가 되기도 하는데 반대로 아름다운 말, 감동적인 말, 유익하고 유쾌한 말은 듣는 이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위로가 되며 아름다운 소통이 된다. 

하여 그 말이란 게 발이 없어도 천 리를 가고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했다. 말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단적으로 비유한 것이다. 
내가 늘 읽고 감탄하는 인간관계와 대화에 이런 게 있다.

고대 로마의 집정관이었던 파비우스는 지혜로운 싸움으로 카르타고의 영웅 한니발을 물리치고 나라를 지킨 명장으로 역사에 기록된 인물이다.
승승장구 로마를 압박해 온 한니발 대군을 맞은 파비우스의 대응전략은 방어 위주의 전법이었다. 공격하고 싶어 안달이 난 장졸들이 그를 ‘한니발의 머슴’이라 조롱했다. 

명예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겼던 당시 로마 장군에겐 결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수성을 고수한 것은 로마군이 적군에 비해 열세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장정長征의 피로에 지칠 게 번한 카르타고 장졸들의 약점을 간파하고 그걸 이용할 셈이었다. 

파비우스가 정면대결을 회피하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시민의 그릇된 비난과 감정적인 성화에 못 이겨 자기 소신을 쉽게 굽힌다면 중책을 맡을만한 지도자라 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대답한 말은 후에 그의 지혜로운 싸움이 어떻게 많은 병사의 희생 없이 로마군을 승리로 이끌었던 가로 입증되었고 칭송 받았다.

파비우스가 지략과 침착성으로 대변되는 ‘로마의 방패’였다면 그에 맞서 나아가 싸우자고 군과 시민을 선동한 젊은 장군 미누키우스는 용맹성으로 명성이 자자한 ‘로마의 창’이었다.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군과 시민들이 미누키우스를 지지했기 때문에 로마군의 지휘권은 양분되었다. 

몇 차례의 승전에 교만해진 미누키우스는 무리한 전투를 계속, 결국 노회한 한니발의 계략에 말려 대패, 그 목숨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보다 못한 파비우스가 그의 목숨을 구하고 이어 카르타고 군을 패주시켰다. 

승전 후 미누키우스가 파비우스 앞에 무릎을 꿇고 “당신은 무용과 지도력으로 한니발을 정복하셨고 지혜와 선량함으로 동료를 정복하셨으니 동시에 두 가지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우리가 한니발에게 패한 것은 수치였으나 장군에게 진 것은 은총이며 영광입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경솔하였음을 사과했다.

파비우스가 묵묵히 동료 장군의 목숨을 구한 대범하고 정의로운 아량도 훌륭하려니와 자신의 잘못을 서슴없이 시인하고 용서를 빈 미누키우스의 당당하고도 신선한 용기가 아름답다. 

이 시대의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는 파비우스 같은 사람 뿐만 아니라 미누키우스 같이 자신의 과오를 솔직히 인정하는 옳은 용기의 소유자도 필요하다.
 비겁한 거짓말과 악한 은폐를 그럴 듯하게 감춰 포장한 위선자들의 뻔뻔함이 너무 만연되고 있어 이 사회가 속으로 병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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