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이 불행한 게 사실이라면 대체 무엇 때문일까. 그 원인을 꼽는다면 그중 핵심적인 것만 꼽더라도 아마도 열 손가락이 모자랄 것이다.
그 가장 큰 불행한 이유란 너나할 것 없이 부와 권세의 신전을 기웃거리느라 버젓이 낮도둑가면을 쓰는 데 있다.
그 가면은 맹신의 표증表證으로 쓴 것으로 그 손에는 제 이익만을 챙겨 담는 낮도둑의 탐욕부대가 들려 있다. 그는 어떡하든 탐착한 것을 손에 넣어 소유하는데 남의 것을 빼앗아 소유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가 일구월심 붙좇는 것은 그것 뿐으로 그것이 일상의 행복을 말리고 불행을 부른다는 사실에 개의치 않는다. 그는 삶에 있어 소중하게 지켜야 하는 것, 이를테면 믿음과 약속과 인간관계, 남에 대한 배려 같은 것들을 버릴 때나 깨질 때 얼마나 고통스러운 가를 상관하지 않는다.
도시 남의 행복은 말할 것도 없고 남의 삶에 일말의 존중이나 연민이 없는 것이다.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의 정의대로 행복이란 게 우리를 즐겁게 해 주는 어떤 느낌이란다면 그는 행복감을 느끼며 살지 못하는 것이다.
낮도둑의 치명적인 불행은 그 가면을 좀처럼 벗지 못함에 있다.
자신이 왜 불행한가를 알지 못하는 것보다 더 불행한 것은 알면서도 그 가면을 벗지 못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낮도둑이 일류 레스토랑에 뻐기고 앉아 고급 식사를 한다고 한들 시원한 남실바람이 부는 대청마루에서 오전 밭일을 끝내고 소찬으로 꿀맛인 점심을 드는 농부보다 더 행복하다 할 수 없는 것이다.
현대인의 또 다른 불행은 믿고 의지할만한 의지가지가 없다는 데 있다.
신은 죽었다하고 교회의 냉담 자들은 날로 늘고 있다. 그 대신에 대중스타 같은 제신諸神들이나 영웅들이 속속 등장했다. 대중은 저들을 턱없이 열광하고 추종한다. 신앙심은 갈수록 변질되고 인간관계에도 신뢰체계가 위태롭게 흔들리게 되었다. 믿고 따를 신앙이나 지도자가 없다는 것은 방황한다는 걸 의미한다. 그건 고독한 것이며 불행한 것이다.
현대인이 미처 깨닫지 못해 놓치고 사는 행복의 상실 때문에 불행하게 산다.
옛날에는 볼 것, 먹을 것, 일할 것, 즐길 것들이 부족해 행복할 기회가 아주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보다 더 행복했다. 아주 작은 일상의 행복이라도 누림을 감사했기 때문이다.
옛날엔 석복함에 있어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겸손했다. 그만큼 인문의 꽃이 활짝 피고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생활철학이 존중되었다. 지금은 만원인 욕망의 전차가 과속으로 달리기를 능사로 삼는 데 불행이 있다. 산에서 강에서 들판에서 멈춰 하늘도 올려다보고 묵정밭의 꽃다지도 보고 사냥에 성공한 일개미들의 의기양양한 귀환행렬도 보며 살아있음을 감사할 수 있어야 행복한 다이돌핀이 샘솟는 것이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물질적인 결핍이라든가 신체적인 장애 때문이 아니다. 행복할 수 있는, 행복을 받아들일 수 있는 따듯한 가슴을 잃어 가기 때문이다.
새로 핀 꽃을 보고 그 꽃에 매료당하는 것은 가슴의 영역이지 머리의 영역이 아니다. 생명의 신비는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다. 삶의 부피나 덩이만 생각하고 삶의 질을 놓쳐 버리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다.
처염한 핏빛 저녁노을에 마주 서서 먼 여행에서 돌아오는 여객기를 바라볼 때 가슴속으로 잔잔한 행복감이 은류隱流함은 사람마다 행복이 샘솟는 옹달샘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창공에 떠가는 여객기 안에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타고 있지만 그저 그들의 무사귀환에 안도하고 그들을 기다리는 가족의 기쁨에 절로 미소가 걸리는 게 또한 행복의 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 손이 닿지 않은 데 있는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며 자기 안에 있는 행복의 샘을 자주 퍼 쓰지 않으면 그 샘은 메말라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것이다.
행복이란 다분히 찾아 누리는 것이지 남한테 얻어 누리는 게 아니다. 누구 때문에 행복하고 누구 때문에 불행하다 여기는 것은 행복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다.
행복의 씨앗은 나의 마음 밭에서 자라 영그는 것으로 여러해살이다. 그 씨앗을 심어 가꿀 때 너무 힘들어 눈물을 흘리는 것도 나이며 그 것이 자라 꽃을 피울 때 반겨 행복한 것도 내 몫이고 풍성한 열매를 웃으며 수확하는 주인도 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