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표(42)는 초롱초롱하다. 예나 지금이나, 그라운드 안에서나 밖에서나.
안양공고를 졸업하고 2000년 안양 LG(현 서울)에서 데뷔한 이래 2013년 북미프로축구(MLS) 밴쿠버 화이트캡스에서 은퇴할 때까지 늘 영리한 플레이로 축구팬들을 사로잡았다.
국가대표로도 127경기에서 5골을 터뜨렸다. 박지성(은퇴)과 함께 한국 축구를 10년 이상 지탱해온 기둥이다. 2002 국제축구연맹(FIFA) 한·일 월드컵 4강 신화부터 2006 독일 대회, 2010 남아공 대회까지 세 차례 월드컵을 선수로 경험했다. 2014 브라질, 2018 러시아 대회에서는 중계방송 해설자로 팬들을 만났다.
지난해를 끝으로 KBS 해설위원을 그만뒀다. “성격상 늘 다른 사람을 칭찬해 왔지만, 해설을 하면서 이기는 것에만 집중하게 됐다. 그러다보니 내 중심이 흔들렸다”는 고백이다. 해설을 하면서 후배선수들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비판한 것에 대해서는 ‘내 잘못’이라면서 “그러다보니 해설을 해선 안 된다는 마음이 생겼다”고 한다.
마이크는 내려놨지만 쉴틈이 없다. “재미있는 일들을 하고 있다”는 그는 여전히 축구계 어딘가에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최근에는 대한축구협회(KFA) C급 지도자 강습회에도 참가했다. “축구라는 건 배워야한다고 늘 생각해왔다”며 “축구를 해보는 것, 축구를 배워보는 것, 축구를 누군가에게 가르쳐봐야 하는 것, 이 세 가지가 이뤄지지 않으면 축구를 다 아는 게 아니라고 늘 말해 왔다. 나는 축구를 직접 했고 배우기도 했지만 가르쳐보지 않았기 때문에 축구를 다 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2주 간 강습을 마치고 깨달았다. “지도자와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많은 걸 느꼈다. 지도자로서의 내 한계를 본 것 같다. 거기 전임 지도자분들은 ‘이제 시작이니까 당연하다’고 했지만 역시 나는 지도자를 안 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이영표는 삶 자체가 도전의 연속이었다. 20대 중반에 네덜란드 명문 PSV 아인트호벤으로 갔다가 역대 한국선수 중 두번째로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EPL)에 진출했다. 지금은 손흥민으로 대변되는 토트넘 홋스퍼의 첫번째 한국인 선수다. 독일 분데스리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선 현재 세계적인 명장이 된 위르겐 클롭과 한솥밥을 먹었다. 사우디아라비아(알 힐랄)를 거쳐 K리그가 아닌 밴쿠버에서 커리어를 마감한 것도 축구인생을 위한 포석이었다.
네덜란드 시절, “연습에 죽도록 가기가 싫었다”고 회상했다. “처음 갔는데 내가 연습 템포를 못 따라갔다. 선수들이 연습 때마다 불만을 터뜨렸다. 6개월 동안은 연습이 스트레스처럼 느껴질 정도였다”는 것이다.
한국 축구가 빠르다고 하지만 유럽에 비할 바는 못 됐다. 이영표는 “축구를 다시 배웠다”고 했다. “6개월 동안 죽어라 연습해서 선수들의 템포를 따라갔다. 그렇게 녹아들다보니 이렇게 빠른 템포로 하는 게 제일 재밌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빠르게 하려면 단순하게 해야한다. 반대로 심플하게 해야 빠르게 할 수 있다”는 경험법칙이다.
그렇게 유럽 최정상의 무대를 밟고 또 밟았다. PSV 시절엔 박지성, 필립 코쿠, 마르크 반 봄멜 등과 함께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4강에 올랐다. AC밀란(이탈리아)과 4강 2차전 경기는 유럽축구 팬들 사이에선 전설적인 경기로 통한다. 이후 토트넘에서도 쟁쟁한 선수들을 상대로 공격적인 축구를 펼치며 EPL 팬들을 사로잡았다.
“유럽에서 뛰면서 축구를 정말 잘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세계 최고의 선수들도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면서 “자신감을 잃을 것도, 교만해질 것도 없다. 나는 정말 많이 배웠다”고 했다.
무려 여섯 나라 리그를 체험한 이영표다. 후배들의 해외 이적을 어떻게 볼까. 일본, 중동, 유럽, 그리고 최근의 중국까지, 이적 루트는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선수의 팀 선택은 때로 비난을 사기도 한다.
이영표는 “축구를 하면서 하는 선택은 다 다르다. 어떤 선수는 행복을 추구할 수 있고, 어떤 선수는 최고의 무대 만을 노릴 수도 있다. 개인의 삶에 대한 문제이기에 옳고 그름을 말할 수는 없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아시아 출신 선수가 유럽에서 뛸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다른 곳에서 배우지 못한 엄청난 것들을 보고 배울 수 있다. 누가 내게 물어본다면 나는 유럽 상위 12개 리그에서 축구를 하라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라는 전제를 깔았다.
결국 경기장에 올 이유를 만들어줘야 한다는 얘기다. “경기장에 갈 이유가 없는 사람들을 경기장에 끌어오는 것이 중요하다. 그 이유를 만들어주기 위해선 축구계가 나서서 팬들과 접촉을 해야하고 기억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했다. “그런 소통이 한국에서도 몇년전부터 있는 것 같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이나 대한축구협회가 일을 잘하고 있다. 그런 것들이 15년 정도 지속된다면 더욱 희망적일 것으로 보고 있다.”
더 중요한 것도 놓쳐선 안 된다. 경기력이다. 기본적으로 축구가 재밌어야 관심이 늘고 중계방송, 스폰서까지 붙는다. 이상적인 그림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금전적인 부분이다. 다른 나라 리그보다 자금력에서 뒤지다 보니 스타선수들이 유출된다. 인기는 물론 경기력 유지에도 걸림돌로 작용한다. 연봉을 많이 주고 싶어도 수익구조가 취약하니 현실의 벽은 높기만 하다.
이영표는 “결국 현실을 직시해야 문제를 헤쳐나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지속적으로 좋은 선수를 만들어 나가는 토양을 다져야 한다는 것이다. “구단의 가장 좋은 수익 모델은 역시 선수 판매”라면서도 “해외에 선수를 판다고 하더라도 대체자를 배출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끊임없이 유소년에서 좋은 선수를 만들어줘야 한다. 재정적으로 안정을 취하면서 더 좋은 선수를 만들어 균형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지에 포커스를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설자로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축구 내부의 문제에도 꾸준히 귀를 기울여왔다. 이영표는 한국프로축구선수협회의 고문 겸 이사다. 선수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국제프로축구선수협회(FIFPro)의 한국지부인데, 이 선수협이 한국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한 인물이 바로 이영표다. 해설위원으로 일하는 동안에도 국내 선수들의 권익 보호에 앞장서 왔다. 지금까지 팬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다.
“2012년 밴쿠버에서 뛸때 야마자키 타쿠야 FIFPro 아시아지부 회장이 집 앞까지 찾아와 ‘호주, 일본에도 선수협이 있는데 아시아 축구의 중심인 한국에만 없다’면서 설립을 도와달라고 했다”고 돌아봤다.제안을 받아들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FIFPro 멤버였기 때문이다.
“토트넘으로 처음 이적한 날, 구단 직원이 FIFPro 가맹 서류를 가져다 주면서 ‘혹시 네가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위험에 처했을때 여기가 널 도와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외국에서 본 FIFPro는 구단과 선수가 힘을 합치는 것을 도와주는 긍정적인 모습이었다. 선수협은 리그의 권익이 우선이고 선수의 권익은 그 다음이다. 선수들만 욕심 부리는 게 아니라 양보할 수 있는 조직이다. 그렇게 리그 전체를 발전시키는 것을 오래 봐왔기 때문에 야마자키 회장의 제안에 응했다”고 설명했다.
요직을 맡았지만 순탄치는 않았다. 연맹과 협의를 통해 공개적으로 선수협을 설립하려 했으나 구단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네가 뭔데 나서느냐”는 관계자도 있었다.
그래도 구단들과 축구 관계자들을 만나며 선수협의 존재 이유를 설명했다. “내가 만약 전면에 나서서 이 단체의 당위성을 말한다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안에 있으면서 그 내부가 옳다고 말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깥에서 이 존재가 필요하다는 걸 많이 설명해왔다”고 이제는 말한다.
이영표가 발벗고 나선 지 올해로 꼭 8년째다. 선수협은 이근호(울산) 회장과 염기훈(수원), 박주호(울산) 등 선수들이 참가하는 단체로 거듭났다. 리그, 국가를 대표하는 이들이 직접 구단을 돌며 선수 권익에 대한 강연을 하기도 한다.
“현역 선수들이 선수협을 한다고 하면 분명 미움을 살 수도 있다. 노조라는 인상이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 선수들을 위한 단체다. 이익 집단이 아니다. 그런 선수들을 위해서라도 유명하고, 대우받는 선수들이 나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근호나 염기훈 등 현역 선수들은 그런 부분을 모두 이해한 상황에서 후배들을 위해 전면에 나서줬다. 프로선수로서의 자세가 정말 대단하다. 나도 존경하고 또 배워야 할 부분”이라고 후배들을 추어올렸다.
선수협 활동은 이영표 스스로에게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각 나라를 거친 다양한 경험에서 비롯된 행동이기도 했다. 밴쿠버에서 뛸 때는 행정도 배웠다. “밴쿠버에서 은퇴하고 대학에서 스포츠마케팅을 배우려고 했다. 하지만 구단 쪽에서 ‘그러지말고 1년만 더 뛰어주면 구단 프런트에서 배울 수 있게 해주겠다’고 해 1년 더 뛰면서 구단 마케팅팀에서 일을 배웠다”고 한다. 축구와 이영표, 떼려야 뗄 수 없는 질긴 인연이다.
이영표는 바로 이 축구로 사회에 공헌하는 것이 목표다. “우선 어린 아이들을 교육하고 싶다. 어린 나이에 배워야할 기술, 자세, 마음가짐이 있다. 그걸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고 싶다. 또 축구는 생각보다 많은 돈이 든다. 돈이 없어서 축구를 못하는 친구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일도 하고 싶다. 동시에 선수협 고문 역할도 할 것이다. 구단, 리그, 선수 간의 협력 관계가 무척 중요하다. 인기 있는 리그를 만들기 위해선 모두가 손을 잡아야 한다. 최근 연맹도 좋은 정책을 많이 내고 있다. 축구라는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함께 나아가고 싶다. 그런 일들이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자 역할이다.”
이경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