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이 산문집 <물소리 바람소리에서>에서 삶이 신선하고 활기차려면 울림이 있어야 하는데 마음이 텅 비어있어야 그 울림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 울림의 의미는 아마도 공명이나 감동을 뜻할 것이다.
그런데 참선으로 정각正覺의 경지에 이른 스님이야 마음을 비울 수 있겠지만 범인 대중이야 욕망이라든가 야심, 사랑, 기쁨, 질투심 같은 것들을 선선이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욕망이란 인간이 소유한 것들 중에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호기심이라는 욕망의 눈이 트이면 삶의 보람이나 즐거움이나 행복이 결실한다.
스님에겐 마음을 비우지 못하는 대중이 어리석고 답답해 보일지 모르나 대중은 혼란스러운 갈등에 빠진다.
당장 내일 지구의 종말이 닥칠지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어야하고 도살장에선 돼지를 잡아도 어디선가 돼지우리에선 돼지새끼가 태어난다. 산다는 것은 모순되게라도 존재하는 것으로 시작되며 부모를 장례 지내고 돌아와서도 저녁밥을 한 술 뜨는 삶이란 모순의 합리화인 것이다.
샤콘느라는 춤곡은 스페인의 느린 무곡으로 그 선율은 너무 비장하고 흐느끼는 듯 하여 세상에서 가장 슬픈 클래식 음악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무희가 슬프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슬픈 음악을 들으며 어떤 젊은 연인들은 그 비감한 느낌에 취해 말할 수 없이 애착하는 입맞춤을 한다. 그들은 마음을 비우기는커녕 오히려 더 애틋한 마음이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고흐는 얼굴을 파묻은 나체 여인을 그려 <비애>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것은 임신 중인 늙은 창녀의 나체화다. 그는 인상파 화가로서 사물을 외형이 아닌 인상으로 파악해 형상화했다. 아마도 붓을 들기 전 그의 마음은 연민과 동정, 경멸과 분노 같은 감정이 섞여 들끓어 고요한 마음으로 그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그런 혼란스러운 마음을 비우지 못한 탓에 그 <비애>는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
그 그로테스크한 색조가 그의 마음, 일테면 자기감정의 혼돈을 못 이겨 귀를 자르는 자해를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 만일 그가 수도사처럼 마음을 비웠더라면 그 명작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차이콥스키의 대표적 교향곡인 <비창>은 그가 모든 영혼을 쏟아 넣은 작품으로 매우 염세적이다.
초연에 번번이 실패하였는데 그가 작품에다 공포, 절망, 패배 같은 염세적 요소를 넣어 작곡했기 때문이었다. 그 역시 마음을 비웠더라면 <비창>이라는 명작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는 슬픈 대가를 치렀으니 초연 수 일 후에 콜레라에 걸려 죽었다. <비창> 만큼이나 비감스러운 최후를 맞았다.
하여 저 두 예술가의 비감어린 작품을 보며 한 불제자의 마음을 비워야 울림이 있다는 선문이 얼마나 형이상학적이고 비현실적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자꾸 비우라면 무엇을 어디까지 버리고 포기하라는 것인지 범인에겐 어려운 수신이다.
사바세계를 도량으로 만들자는 것이라면 그건 견성에 끼는 미혹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