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北 체제보장 논의 땐 6자회담 가동돼야”… 톱 다운 제동
6자회담 앞세워 러시아 동북아 영향력 확대하겠단 의도인 듯
文 “빠른 시일 김정은 만나 북미대화 촉진”… 톱다운 의지 확인
문재인 대통령이 비핵화 협상의 속도감 있는 전개를 위해 추구하고 있는 남북미 정상 간의 ‘톱 다운(Top down)’ 대화 방식에 러시아가 제동을 걸고 나섰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북러 정상회담에서 과거 6자회담 재개의 필요성을 공개 언급하면서 자칫 추후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이 늘어지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된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남쪽 루스키섬 극동연방대에서 김 위원장과 북러 정상회담을 마친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 ‘지금 상황에서의 6자회담 가동의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북한의 체제 보장에 대해서 논의를 할 때에는 6자회담 체계가 가동돼야 된다고 보고 있다”고 답했다.
이어 “한미가 북한의 체제보장 조치들을 충분히 내놓을 수 있다면 6자회담이 가동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한미의 보장 메커니즘은 충분치 않을 것이라 보고 있다”며 “따라서 북한에겐 다자안보체제가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강조했다.
푸틴이 공개적으로 6자회담 재개 필요성을 언급한 것은 현재 남북미 3국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는 비핵화 협상 틀을 흔들어 러시아가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을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북미 협상 교착이 장기화 될 조짐이 보이자 다자 협상으로 돌파구를 마련하겠다는 의도가 담긴 것이다.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다자 논의를 통한 북핵 해결을 주장해 왔다. 비핵화 협상 국면에서 직접 당사국인 북·미는 물론 중국보다 영향력이 작기 때문에 줄곧 6자회담과 같은 다자구도를 선호해 왔다.
6자회담은 2003년 한·미·일과 북·중·러의 차관보급을 수석대표로 해 가동됐다가 2008년 12월 12차 회담을 끝으로 중단됐다. 2005년 9·19공동성명, 2007년 2·13합의를 도출하고도 정상급 후속 합의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
이후 지난해 북미 정상이 ‘톱 다운’방식으로 사상 최초의 6·12 싱가포르 1차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데 이어 지난 2월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까지 이어지면서 6자회담은 유명무실화 됐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최종 의사결정권이 없는 차관보급 단위에서 이뤄진 합의는 차관-장관-정상급으로 이어지는 보고 과정에서 실행 동력이 급속히 떨어진다는 6자회담 사례의 문제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 문재인-김정은-트럼프 3국 정상간 ‘톱 다운’ 방식이었다.
정상 간 통 큰 합의를 바탕으로 실무자들이 합의 이행을 신속히 추진할 수 있다는 것이 ‘톱 다운’ 방식의 최대의 장점이라는 게 한미 정상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은 이날 북러 정상회담에서 6자회담 필요성을 공개 언급하며 동북아시아 내 미국의 영향력을 줄이고, 반대로 러시아의 존재감을 키우고자 하는 욕심을 그대로 드러냈다는 평가다.
푸틴 대통령이 표면적으로는 북한의 체제보장을 명분으로 6자회담의 필요성을 내세우고 있지만 이면에는 극동지역 개발과 동북아 주도권 싸움에서 미국에 밀리지 않겠다는 다목적 의도를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 가능하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톱다운 방식으로 4차 남북 정상회담과 3차 북미 정상회담을 조속히 개최하겠다는 문 대통령의 구상에도 일정부분 차질이 예상된다.
문 대통령은 이날 아시아뉴스네트워크(ANN) 이사진 접견 자리에서 “나는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김 위원장을 만날 것이고, 북미 대화 또한 촉진할 것”이라며 톱다운 방식의 남북미 대화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이 6자회담을 강조하게 되는 데 일정 부분 원인을 제공한 측면이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남북미 3자 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푸틴이 끼어들 명분을 제공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15일 청와대 수석 비서관·보좌관 회의에서 트럼프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 결과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남북미 3자 정상회담 수용 의사가 있다는 점을 공개했다.
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과 기대감을 표명했다”며 “김 위원장이 결단할 경우 남북미 3자 정상회담도 가능하다는 뜻을 (내게) 밝혔다”고 소개했다.
남북미 3자 정상회담은 종전선언 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이는 곧 북한의 체제보장 조치와 연결된다. 지난해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 미국의 상응조치 일환으로 남북미 3자 종전선언 카드가 추진된 바 있다.
비핵화 문제는 근본적으로 북미 간에 풀어야 하지만 평화협정 체결 논의로 넘어가는 과정에서는 한반도 주변 당사국들로부터의 보증이 필수적으로 뒷받침 돼야 한다는 인식이 녹아 있다.
하지만 미국 조야에서 ‘종전선언 대(對) 완전한 신고’ 프레임을 씌웠고, 북한이 난색을 표하면서 3자 종전선언은 결국 무산됐었다. 종전선언에 중국이 적극 개입하려 하자 미국이 반대하며 종전선언 카드는 유야무야 됐다.
이후 북한은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체제보장과 종전선언 대신 제재완화와 경제적 보상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협상 전략을 선회했었다.
그러나 ‘하노이 노딜’ 과정을 거치면서 북한은 다시금 ‘안보 대(對) 경제보상’ 맞교환 전략을 포기하고 1차 회담 당시 추진했던 체제보장으로 방향타를 다시 틀었다.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는 지난 14일 “조선(북한)이 제재 해제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면 미국은 다른 행동조치들로 저들의 적대시정책 철회 의지과 관계개선 의지, 비핵화 의지를 증명해 보이지 않으면 안되게 된다”며 북미 관계개선을 앞세운 체제보장을 주장했다.
이를 두고 북한이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한반도 완전한 비핵화 ▲전쟁포로 및 실종자 송환 등 크게 4가지를 명시한 ‘센토사 합의’의 순서에 따라 북미관계 수립에 집중하기로 방향을 수정한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한반도 비핵화 문제에 개입하겠다는 러시아의 의도는 니콜라이 파트루셰프 러시아연방안보회의(SCR) 서기의 방한 목적에서도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파트루셰프 서기는 이날 오후 청와대에서 문 대통령을 접견한 자리에서 ‘중·러 공동행동계획’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다. ‘중·러 공동행동계획’은 ‘쌍중단·쌍궤병행’이라는 중국식 비핵화 해법과 3단계에 따라 비핵화를 이뤄야 한다는 러시아식 해법의 공통점을 모은 중러 간 ‘비핵화 공동로드맵’을 말한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국과 러시아가 공동행동을 취하겠다는 것이다.
2017년 5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과, 왕이(王毅) 중국 외교 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이러한 계획안을 공동발표 했다.
궁극적으로는 남북미 3자 틀 안에서 이뤄지고 있는 비핵화 협상 구도 속에서 중국과 러시아가 손잡고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것이 ‘중러 공동행동계획’이라 할 수 있다. 단계적·동시이행을 추구하는 북한의 입장과도 일정부분 부합한다.
조성렬 연구위원은 “이번에 러시아는 ‘러시아식 비핵화 해법’이라는 새로운 방안을 마련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른바 전략 핵무기 감축협상 차원에서 해야된다는 것으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북러 공동관리 방안, 단계적 핵 감축에 대한 국제공동방안 마련에 대한 복안(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아마 푸틴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게 직접 설명하고, 이번에 방한한 파트루셰프 서기도 문 대통령에게 설명할 것 같다”며 “북한과 한국을 동시에 설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러시아의 구상대로 비핵화 협상이 북미 간 군축협상으로 발전할 경우 군축과 관련해 직접적인 개입 명분이 없는 한국은 빠지고, 러시아가 미소 냉전 해체과정에서 터득한 군축 노하우를 토대로 협상을 돕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새로 들어올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새롭게 미·북·러 3각 구도로 재편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신재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