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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노락사(生老樂死)

두레박 - 김철준(본사 객원기자/칼럼니스트)
우리 인간은 생노병사라 해서 태어나면 살다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천고의 진리를 앉고 산다. 
그러나 태어나 죽기까지는 단계가 있는데 태어나자 바로 죽는 사람도 있고, 늙고 병들어 고통받다 죽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이 범주에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누구나 오래 살다 고통없이 죽을 수만있다면 더 바랄게 없다는 것이 바람일 것이다. 
하지만 평범하게 사는 것도 좋겠지만 더 욕심을 부린다면 기왕에 늙어 병들지 말고 죽는 것이 행운이고, 금상첨화로 즐겁게 살다 갈수만 있다면 하는 것이다.

즉 생노병사(生老病死)를 생노락사(生老樂死)로 바꾸어 즐겁게 살다 고통 벗고 편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어차피 오는 죽음을 건강히 오래 살다 고통없이 맞이하는 것이 모든 노인들의 바람일 것이다. 

초고령사회로 접어들면서 건강, 경제, 가족관계, 생활면에서 문제들이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돈이 많아도 건강을 잃었거나 즐거움이 없다면 행복할까? 
명예가 있고 권위가 많다고 해서 다 걱정거리 없이 행복하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

세계를 제패한 나폴레옹은 자기 생에 행복했던 시간은 단 5일 뿐이라 했고, 여러 조건의 불행을 앉고 일생을 살아온 헬렌켈러는 행복하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었다고 했다. 

걸을 수 없는 사람은 서서 걸어보는 것이, 들을 수 없는 사람을 들을 수만 있다면, 시력을 잃은 사람은 세상을 보는 것이 최대 행복이고 바람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바람과 행복의 기준은 다르지만 건강과 고통없이 사는 것은 다를 수가 없다. 

노인들은 장수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건강하게 살다 편하게 세상구경 끝내느냐에 관심이 많다. 백세를 맞이하신 김형석 교수님은 살아보니 70세가 가장 좋을 때라 하셨다.
지금 우리는 잘 먹고 건강히 잘살아 보자는 웰빙 시대에 살고 있다. 

공자가 “삶도 모르는데 죽음 어떻게 알아”라고 하신 말씀은 사후세계보다 현실을 깨우쳐 주신 말씀이라 하겠다. 불행이란 자기 자신이 행복하단 사실을 잊어버린 삶, 많은 행복 중 나쁜 것만 생각하기 때문이란 말도 있다.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울지 않는 두견새는 바로 죽여 버리지만, 요다 소부나가와는 요령을 부려서라도 어떻게든 울도록 한다는 것이고, 도꾸가와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생각의 차이를 생각해볼 문제다.

우리 노년들은 “우리 세대 때는~~” 같은 옛날 생각은 버리고 변화하는 현실에 맞춰가며 적응이 필요하고, 많은 복지시설과 노인 문화에 대한 국가의 배려, 사회의 관심 등 얼마나 많은 혜택이 주어여 있는지 헤아리고 불평은 버리고 스스로 자기의 능력과 적성을 찾아 여생을 즐겁게 보낼 방법들을 강구해야 한다. 시계는 기상을 알리는 것이지 취침을 알리는 것이 아니란 이스라엘 격언처럼 남은 시간이 적지 않다는 긍정적 생각으로 개척해 나가야 한다.

삼강오륜도 뒤죽박죽 되어버린 세상, 그러나 인간은 단순한 생물, 즉 동물로서의 인간과 생물이면서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 그리고 이성적이면서 책임질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인간이라는 칸트의 인간성 구분을 이 시대에 곰곰이 생각해볼 문제다.

선인들은 일은 완벽하게 끝을 보려하지 말고, 권위는 끝까지 의지하지 말고, 말은 끝까지 다 하지 말고, 복은 끝까지 다 누리려 하지 않는 것이 행복한 것이라 했다. 마음을 비우고 분수를 지키라는 당부일 것이다. 

우리 노년들은 많이 듣고, 주변은 깨끗이 하고, 잘 차려입고, 지갑을 먼저 열고, 모임에 열심히 참석하고, 주위를 즐겁게 하고, 과감히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적당한 운동과 하나의 특기나 시간관념을 가져야 하고 좋은 친구, 여행, 자연사랑, 노래나 춤, 글 쓰는 것, 책 읽는 것 등 얼마든지 시간과 즐거움을  소화할 수 있는 것이다. 
노인들은 감정을 잃지 말고 때와 장소에 따라 감정을 풀고, 울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고 그것을 가름하지 못하면 죽은거나 다름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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