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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는 삶의 근본이요, 복을 받는 지름길이다”

5월 특별기고 ? - 김재식(충북 진천노인대학장) 일효(一孝)는 백행지본(百行之本)이요, 다복(多福)의 근간(根幹)이다
일년 중 만물이 가장 힘차게 성장하는 ‘가정의 달’ 5월을 맞이하여 가정사의 가장 근본인 효(孝) 사상에 대하여 열거해 보고자 한다.
세계 4대 성인(聖人)의 한 분이시고 동양 최고의 사상가로서 우리나라 성균관 유생 및 모든 유학자들이 숭모해온 공자님의 가르침 중에 첫 번째 가는 교훈은 효제충신(孝悌忠信 :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며 나라에 충성하고 벗 사이에 믿음)을 꼽을 수 있겠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근본이 되는 효사상(孝思想)은 우리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려져 왔다. 그러나 작금(昨今)에 와서는 개인주의의 발달과 함께 가족애와 조상 숭배의 전통이 점점 쇠퇴(衰退)해지면서 효 사상 또한 땅에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손자병법에 용장불여지장(勇將不如智將), 지장불여덕장(智將不如德將)이라고 했다. 필자는 덕장(德將)보다 더 위에 있는 것은 복장(福將)이라고 말하고 싶다. 즉 덕장불여복장(德將不如福將)이다. 복(福)을 많이 받는 운을 타고난 사람은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려나가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복(福)을 많이 받기를 바란다. 수복강령(壽福康寧), 자구다복(自求多福), 끽휴시복(喫虧是福), 개문만복래(開門萬福來) 등 기복사상(祈福思想)이 우리 생활 속에 강하게 깔려 있다.
 

이러한 복을 받아 족히 누리기 위해서는 공자님의 가르침인 효(孝)를 실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우리가 복을 많이 받기 위해서는 복 받을 행동, 즉 자구다복(自求多福)을 해야 한다. 

실례로 조선왕조 500년 동안에 부모님께 효(孝)를 다함으로써 하늘이 내려준 천복(天福)을 받은, 조선 숙종 때의 실화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서울의 돈의문(敦義門 : 서대문) 밖 구파발에 사는 최 서방이라는 농부가 있었다. 지금은 구파발(역)까지 지하철이 연결되어 있고 도시화가 이루어졌지만, 300여 년 전에는 아주 낙후된 깡촌이었다.

최 서방은 연로한 아버지와 건강한 딸아이 하나를 데리고 살면서 화전민에 날품팔이로 연명을 하는 가난한 천민이었다. 그래도 누구보다 남다른 효심이 있어서 집에 올 때는 항상 술과 고기 등을 사서 아버지에게 드리는 지극한 효자였다. 

최 서방이 사는 이웃에는 그의 아버지와  친하게 지내는 안씨 성(性)을 가진 지관(地官:풍수를 보는 사람)한분이 계셨는데 최 서방은 그 친구 분까지 집으로 모셔다 극진한 대접을 했다. 
세월이 흘렀다. 아들의 지극한 효도를 받아온 최 서방의 아버지는 천수(天壽)를 누린 뒤 저 세상으로 가셨다. 서글프고 애통한 마음은 금할 길 없지만 하늘의 뜻이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더욱이 천민이라 선산도 없고 하여, 첩첩산중 외진 곳에 아버지를 모시고자 산소자리를 찾아 다녔다. 

천하고 가난한 사람은 죽어서도 갈 곳이 없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이 광경을 본 안 지관은 평소에 그토록 효성이 깊고 이웃 어른인 자기에게까지 친아버지처럼 모시며 효성을 다한 최 서방이 불쌍하기도 하고 고마워서 이번 기회에 그동안 진 빚을 갚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묏자리 구하느라 정신없이 발품을 팔며 돌아다니는 최 서방을 불렀다. 

“아버님 묏자리는 어떻게 구했는가?” 
“지관어른, 저 같은 천민이 묏자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돌아가신 후에도 쉬실 곳 없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저…” 

최 서방은 가슴을 쓸어내리더니 그만 대성통곡을 했다. 안 지관은 최 서방의 효심에 또 한번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았다. 
“최 서방! 자네야 말로 평소에 돌아가신 부친에게 지극한 효도를 다했다는 걸 동네 사람들은 물론 근동(近洞)에서도 다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 또한 나에게도 잘해서 늘 고맙게 생각했네.

그래서 말인데 실은 내가 죽으면 가려고 묏자리 한곳을 보아 둔 곳이 있네. 그 묏자리를 자네에게 주겠네. 아버님을 그 곳으로 모시도록 하게.”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으오리까? 정말 고맙습니다.”

최 서방은 정중히 인사를 했고, 안 지관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말이야, 그 묏자리는 보통 묏자리가 아니야. 명당 중에 명당이지. 외손이 크게 될 그런 묏자리야. 그러니 자네는 아버님 장례를 마친 후에 서울의 4대문(흥인지문(興仁之門) : 돈의문(敦義門) : 숭례문(崇禮門) : 숙정문(肅靖門))안으로 이사를 하게, 그래야 좋은 일이 생길 걸세.”
“예, 알겠습니다. 안 지관님.”

최 서방은 아버님의 장례를 치른 후 안 지관이 시키는 대로 돈의문(敦義門) 안의 어느 대감집의 행랑채를 빌려서 이사를 했다. 말하자면 대감댁의 집사 겸 하인으로 들어가 마당쇠 노릇을 하면서 지냈다. 
하루는 최 서방이 대감님께 부탁의 말씀을 아뢰었다. 
“대감마님! 제 딸아이가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게 대궐 안에 머물면서 허접한 일이라도 하게 해주세요.” 

“아, 그렇지, 자네에게 딸아이가 하나 있지? 내 한번 알아봄세.” 
대감은 최 서방이 비록 배움은 없고 천민 출신이긴 하나, 평소 진실한 성품에 부지런하고 부모님 살아계실 때 효성이 지극했다는 풍문을 들어 보기 드문 효자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대감은 즉시 자리를 알아보았다. 일이 잘 되느라고 마침 중궁전에 있는 궁녀를 모시는 무수리 자리가 하나 비어 있었다. 대감은 즉시 최 서방의 딸을 천거함으로써 요즘말로 하면 취직을 시켜 주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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