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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는 삶의 근본이요, 복을 받는 지름길이다”

5월 특별기고 ? 김재식(충북 진천노인대학장) 일효(一孝)는 백행지본(百行之本)이요, 다복(多福)의 근간(根幹)이다
그때가 마침 조선왕조 19대 숙종대왕이 희빈 장씨(장희빈)의 중상모략에 빠져 중전마마 인현왕후를 폐출하려고 하던 때였다. 그 후, 인현왕후는 결국 왕손도 두지 못하고 35세의 나이로 창경궁에서 승하하였다. 왕후는 그 험하고 위태로운 사태에도 덕과 품위를 잃지 않았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숙종대왕도 아까운 나이에 먼저 간 인현왕후를 늘 그리며 하루는 야밤에 미행으로 중궁전을 찾았다. 중궁전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인현왕후가 기거하던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게 아닌가.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궁녀인 듯이 보이는 여인이 옷가지를 매만지고 있었다. 숙종대왕은 인기척과 함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험! 내가 이 나라의 임금이니라. 너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고 있는고?” 
“전하! 저는 중궁전의 최 무수리라 하옵니다. 왕비마마가 돌아가신 후 이 방을 지키면서, 생전에 입으셨던 마마의 옷가지를 손질하고 있는 중이었사옵니다.” 

그렇지 않아도 먼저 떠난 왕비 생각에 자주 마음이 허전하고 울적하던 차에 왕비의 옷가지를 매만지고 있던 마음씨 고운 이 여인을 보자, 숙종대왕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인양 최 무수리에게 마음이 끌렸다. 

숙종대왕은 그날 밤 그 여인과 하룻밤을 지냈다. 이후 숙종대왕은 최 무수리를 찾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밝은 날 숙종대왕이 최 무수리를 보니, 골격이 큼직큼직하고 얼핏 보기엔 사내 대장부처럼 생겨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열 달 후 최 무수리는 왕자를 낳았다. 내시는 이 사실을 즉시 숙종대왕께 고했다.

“전하! 감축 드리옵나이다. 중궁전의 최 무수리가 왕자 아기씨를 낳았습니다.”
“최 무수리가 왕자를 낳았다고? 어허 이거야말로 나라의 경사로다. 왕실이 번창하려면 왕자가 많아야 하는데, 큰 기쁨이로다. 상궁은 어서 가서 그 왕자 아기를 데려다 내전에서 잘 기르도록 하라!” 

숙종대왕의 어명에 따라, 그 아기는 내전으로 옮겨져 어엿한 왕실 교육을 받으며 잘 자랐다. 역대 왕자들은 보편적으로 나약하여 각종 질병을 안고 살았는데 이 왕자는 외가 쪽의 어머니, 즉 최 무수리의 튼튼한 유전자를 이어받아 감기도 한번 걸리지 않고 잘 자라주어 주상전하의 총애는 물론 왕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

숙종대왕이 재위 46년 향년 60세로 1720년 승하하자 희빈 장씨의 아들인 경종이 즉위하였다. 경종은 자식이 없고 병약하여 재위 4년 만에 37세로 승하하였다. 
경종이 병약한 것은 인현왕후가 폐위된 후, 어머니인 희빈 장씨가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인현왕후가 다시 복위되는 바람에 희빈으로 격하되자, 표독(慓毒)하기로 소문난 장희빈이 왕세자로 책봉된 아들의 심벌을 잡아당겨 남자 구실을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경종의 뒤를 이어 최 무수리의 아들 연잉군이 조선의 제 21대 왕으로 등극을 하니 그가 바로  영조대왕이다. 
500년 역대 조선왕조 중에서 가장 오랜 집권(1724년~1776년)을 한 영조대왕은 30~82세까지 약 50여 년간 재임한 왕으로서 사색당파 싸움의 병폐를 없애고자 탕평책을 시행하는 등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바로 이러한 영조대왕의 외할아버지가 돈의문 밖 구파발, 첩첩산중의 산골에서 날품팔이와 농사를 지으며 살던 천민 출신으로서, 효성을 다한 최 서방(영조에 의해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 추서됨)이었다. 

이와 같이 최 서방의 가문이야기는 부모님께 효(孝)를 다하면 천민의 외손자가 왕이 될 수도 있고 가장 낮은 신분에서 조선시대 최고의 벼슬인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영의정까지도 올라가는 것처럼 천복(天福 : 큰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입증해준 좋은 사례라 하겠다. 

세종대왕께서도 공자님의 가르침을 본받아 가전충효 세수인경(家傳忠孝 世守仁敬)해야 한다고 대소신료(大小臣僚)와 백성들에게 강조하셨다. 
즉 부모에게 효도하는 정신은 자손대대로 이어가야 하고 이웃과의 화평과 어른을 공경하고 사회를 밝게 하는 인경(仁敬)의 자세는 대대로 전수하여 밝고 아름다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 가자고 하신 것이다.

나무도 뿌리가 튼튼해야 가지가 무성하고 많은 꽃과 열매를 맺듯이 우리 인간사도 나무와 같아서 부모와 조상을 잘 섬겨야 자손이 번창하며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복을 받게 된다는 철학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를 두고 ‘일효는 백행지본(一孝는 百行之本)이요, 자구다복의 근간(自求多福의 根幹)이다.’ 라고 말하고 싶다.

조선전기 세종조의 학자이고 한문소설의 효시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창작하셨으며 생육신(生六臣)의 한 분이신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선생께서는 “이 세상 3,000여 가지의 죄목(罪目)중 가장 큰 죄인은 불효자이고, 가장 크게 성공한 사람은 효자라는 칭호를 받는 자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공자님께서는 ‘효에는 3가지가 있다(효유삼 : 孝有三)’고 하셨다. 즉 대효존친(大孝尊親), 기차불욕(其次不辱), 기하능양(其下能養)이라고 하신 것이다. 풀어 설명하자면 효 중에 제일 큰 효는 자손에 의하여 부모님이 많은 분들로부터 존경받으며, 그로 인하여 항상 기쁘게  지내도록 해드리는 것이요, 그 다음은 부모님을 욕(辱)되지 않게 자식의 도리를 다해야 함에 있다. 

마지막 효는 바로 봉양(奉養)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은 마지막 의무라 할 수 있는 봉양도 하지 않으려고 하니 효는 말할 것도 없고  도덕성의 기본이 흔들리고 있지 않나 하는 염려마저 된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 정보화 시대라고 하지만, 효사상(孝思想)은 여전히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임에 틀림없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인성의 근본인 효의 실천을 다 함께 되새기고, 그 정신을 후대에도 깊이 심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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