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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위해 싸웠지만”… 지팡이 짚은 ‘6.25 소년병’의 눈물

6.25 참전 소년병, 유공자 예우 제대로 못 받아 전우회장 "남은 소년병 모두 고령… 활동 힘들다"
지난달 21일 오전 대구시 남구 낙동강 승전기념관에서 ‘제22회 6.25 참전 순국소년병 위령제’가 진행되고 있다.
“내년에도 위령제를 지낼 수 있겠습니까. 이제 전우회의 활동도 늙은이들의 아집으로 비치진 않을지 걱정이 앞섭니다.”
21일 오전 대구시 남구 낙동강 승전기념관에서 열린 ‘제22회 6·25 참전 순국소년병 위령제’에서 만난 윤한수(85) 6·25 참전 소년·소녀병 전우회장은 지팡이를 짚은 채 말했다.

2대 독자인 윤 회장은 6·25전쟁 발발 당시 대구 계성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동네 아이들이 전쟁터에 끌려가고 없는 일이 허다한 시절이었다.  
윤 회장은 “그해 동네 형 두 사람과 함께 특화병 모집소에 찾아갔다. 어차피 군대에 가야 한다면 친구들과 같이 있는 게 좋겠다는 순진한 생각이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전장에서 ‘꼬마’ 소리를 들어가며 열심히 싸웠다”며 “어린 나이에 목격한 끔찍한 광경이 여전히 마음의 아픔으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6·25 참전 소년병은 병역 의무가 없는 만 18세 미만 정규군을 뜻한다. 국방부는 이 같은 소년병이 여군 400여명을 포함해 2만9000명이 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중 전사자는 2573명이다. 

살아남은 소년병들은 어느새 90세를 바라보는 노인이 됐지만 여전히 학도의용군 등과 달리 국가유공자로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학업을 채 마치지도 못하고 전쟁에 뛰어든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월 20여만 원의 참전수당이 전부다. 

15살에 6·25전쟁에 참전한 장병율(86)씨는 “아직도 함께 군 생활을 하다 전사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다”며 “나라에 대한 섭섭한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지난달 21일 오전 대구시 남구 낙동강 승전기념관에서 열린 ‘제22회 6.25 참전 순국소년병 위령제’에서 윤한수(85) 6.25 참전 소년·소녀병 전우회장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
소년병이었던 남편을 부축해 위령제에 온 김대홍(88)씨는 “남편의 건강이 너무 좋지 않고 정신도 맑지 않은 상태”라며 “내년에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했다. 

윤 회장은 20대 국회에서도 참전 소년병 관련 법안이 통과하지 못할 경우 단체 활동을 정리할 계획이다. 
국가유공자 인정을 위해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다. 

그는 “16대 국회부터 법안을 제출하며 진보, 보수 정권을 모두 겪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며 “이제 남은 2000여명의 소년병 모두 너무 나이가 들었고, 나 역시 더 이상 활동이 힘들다”고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이어 “돈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이제 와 돈을 받은 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나라가 어린 아이들을 전쟁에 동원했다는 역사를 외면하려 우리가 세상을 뜰 때가지 기다리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고 말했다. 

위령제에 참석한 유승민 바른미래당 의원은 추모사를 통해 “19대 국회에 이어 20대 국회에서 발의한 6.25 참전 소년·소녀병 보상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이 자리에 계신 전우 여러분께서도 끝까지 힘을 보태주시길 바란다”고 밝혔다. 

박신한 대구지방보훈청장 역시 “어린 나이에 책을 들어야 할 학생들이 전쟁터에 나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현실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며 “전우회의 염원을 잘 전달해 뜻을 이루는데 일조하겠다”고 말했다.
 석용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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