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초하루인 설날은 예나 지금이나 특별한 음식을 먹었다. 오늘날에는 하얀 가래떡을 썰어 넣어 끓인 떡국을 먹지만, 과거에는 어땠을까.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인 주영하 교수는 조선 중기 문신인 조극선(1595∼1658)이 1609년부터 1623년까지 고향인 충청도 덕산현(현 예산군 덕산면)에 머물며 쓴 일기인 ‘인재일록’(忍齋日錄)에서 음식에 관한 기록을 모아 분석했다.
주 교수는 “조극선은 새해 첫날 차례를 지내고 집안사람들끼리 세배를 한 뒤 성묘를 했다’”며 "인재일록에 설날 세시음식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만두"라고 설명했다.
비록 설날이 아니더라도 1월에 세배를 갔을 때 대접받거나 선물로 받는 음식 중에는 만두가 많았다. 다만 1619년과 1623년에는 병탕(餠湯)을 먹었다고 했는데, 병탕은 떡국을 의미한다.
주 교수는 이식(1584∼1647), 허균(1569∼1618) 등이 남긴 글을 살핀 뒤 “17세기 초반까지는 만두와 떡국을 차례에 올리고 설 음식인 세찬(歲饌)으로도 먹었다”며 “이후 서울의 권문세가를 중심으로 떡국이 세찬으로 소비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설날 음식이 만두에서 떡국으로 변한 이유를 색상으로 추정했다. 만두는 밀가루를 반죽한 피에 소를 넣은 음식인데, 조선 중기에는 한겨울에 밀가루가 거의 없었다.
이에 대해 주 교수는 “한반도의 밀은 겨울에 파종해 6월에 수확했다”며 “한여름에 확보한 밀을 이듬해 1월까지 보관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만두피를 만들 때 밀의 대안은 메밀이었다. 1670년께 작성된 한글 최초의 조리서 ‘음식디미방’에도 만두피는 메밀가루를 쓴다고 기록돼 있다. 그런데 메밀가루는 껍질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면 회색빛이 날 수밖에 없다.
주 교수는 이덕무(1741∼1793)가 편찬한 ‘세시잡영’에서 떡국 안에 들어가는 가래떡을 ‘백탕병’(白湯餠)이라고 적은 사실을 예로 들면서 “조선 선비들의 백색 선호로 미루어 설날 음식은 백색이어야 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19세기 문헌에는 설날 세찬으로 떡국만 등장할 뿐, 만두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지방에서는 떡국 대신 고기와 생선, 과일을 설날 음식으로 먹기도 했다. 인재일록에는 설날 외에도 단오, 유두, 추석, 동지에 먹은 음식에 대한 기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