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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내고 더받는' 스웨덴 연금…책임정치·실용적 접근이 핵심

스웨덴 1999년 新연금제도 도입, 61세 지나면 스웨덴인 누구나 은퇴시기·연금수령일 선택

10개월간 국민연금 개편 방안을 논의해온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연금개혁특위가 합의안을 마련하지 못한 채 지난 8월 30일 공을 국회로 넘겼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인 총선거가 내년 4월에 예정돼 있는 만큼 여야가 연금개혁에 사활을 걸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에 따라 연금 고갈 우려, 출생률 하락으로 인한 납입액 감소 등 난제가 산적해 있는데도 국민연금 개혁이 장기간 표류할 것이란 암울한 전망이 나오고 있다.

우리 현실과 달리 북유럽 복지국가 스웨덴은 1990년대 말 일찌감치 연금개혁을 단행해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연금제도를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스웨덴은 10년 가까운 장기간 논의 끝에 1999년 신(新)연금제도를 도입했다.

현행 스웨덴 공적 연금제도는 현역시절 급여소득 합계에 비례해 수령액이 정해지는 소득비례연금, 그리고 스스로 선택한 운용실적에 따라 수령액이 정해지는 적립연금으로 나뉜다. 여기에 연금 납입액과 수령액이 적은 저소득자를 위한 최저보험연금제도가 있다.

소득비례연금과 적립연금 재원은 급여소득에 따라 국가가 징수하는 연금보험료 납입액이다.
다만 불황이 장기화하거나 고령화 진행속도가 빠른 경우에는 기금에 매년 수납되는 보험료와 지불되는 연금액의 균형이 무너진다.

이런 경우 연금재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자동적으로 제동이 걸려 연금액이 감액된다. 이것이 '급부 자동조정장치'라는 구조다. 이 장치 덕분에 연금재정은 고갈되지 않는다. 실제로 이 장치는 2008년 리먼사태 후 발동됐다. 2010년부터 수년간 급부 자동조정장치가 작동돼 연금액이 감액됐다.

스웨덴인은 은퇴시점을 스스로 정하고 은퇴 직후부터 자신이 낸 만큼 연금을 수령한다. 스웨덴 연금제도는 청년기에는 강제로 가입해야 하지만, 노년기에는 해지할 수 있는 일종의 금융상품이자 저축수단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더 많은 금액을 적립하기 위해 자신의 소득을 높여서 신고하는 경향까지 있다. 자영업자도 연금보험료를 납입하기 때문에 정확한 소득신고를 유도하는 효과까지 있다.

개혁 전 연금제도에서는 수급개시연령이 65세였지만 새로운 제도에서는 61세가 지나면 스스로 수급개시연령을 정할 수 있다.

65세 이전에 수급을 개시하면 매월 수령액이 감액되고 반대로 개시 시점을 늦출수록 수령액이 늘어나는 구조다.

65세 이후에도 계속 일하면 급여소득에 따라 고용주가 연금보험료를 납입하기 때문에 그만큼 장래 연금수령액이 올라간다.

일하는 동시에 연금을 받을 수 있고 일하는 동안 연금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 일하는 동안 수령액을 감액하거나 수급을 중지하면 그만큼 장래수급액이 늘어난다. 70세까지 일한 다음 연금수급을 개시하면 연기한 만큼 수령액이 늘어난다.

스웨덴은 어떻게 성공적으로 연금제도를 설계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우리나라가 향후 연금개혁과정에서 참고해야 할 부분은 어떤 대목일까. 스웨덴 현지 전문가들은 스웨덴의 문제해결능력과 정치권의 책임정치의식 등을 비결로 꼽았다.

스웨덴 방문중 만난 군나르 안데르손(Gunnar Andersson) 스톡홀름대학교 인구통계학과 교수는 "스웨덴 사람들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생겼을 때 실용적인 접근을 한다.

관계된 이들이 모여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도출한다"며 "1970년대 여성들이 노동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할 때도 모든 지표 측면에서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명백해지자 스웨덴은 가족정책을 바꿨다.

다른 나라에서는 수십년 후에 이뤄진 일이 스웨덴에서는 이미 그 당시에 진행됐다. 연금개혁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안데르손 교수는 "(한국이 연금제도에) 아무 문제가 없는 척 하다 가는 시간이 지나서 더 심각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며 "한국이 연금제도에 융통성을 갖는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국민연금 보험료를 더 많이 내도록 하고 그만큼 연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게 하는 방안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조언했다.

스웨덴의 연금연구 분야 권위자인 스벤 호트(Sven Erland Olsson Hort) 스웨덴 린네대학교 명예교수는 한국 국민이 연금 납입액 인상을 감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지금 한국이) 할 수 있는 일은 연금보험료 납입액을 올리는 것"이라며 "다른 방법이 뭐가 있나. 연금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연금 기금을 늘리기 위해서는 (가입자들이 내는) 기여금을 늘려야 한다.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말했다.

스웨덴의 경우 '더 많이 내고 더 많이 돌려받는' 방향으로 연금개혁을 하기 위해 정치권이 적극 나선 바 있다. 세기의 개혁으로 불리는 스웨덴의 1999년 연금제도 대개혁은 1991년 가을부터 7년여에 걸쳐 지속된 초당파적 논의의 결과물이다. 이 개혁은 스웨덴의 뛰어난 정치적 실행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1994년 재집권한 스웨덴 사회민주당은 1990년대초 금융위기로 인한 대규모 재정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1995년부터 1998년까지 4년간 국내총생산의 8%에 달하는 세출 삭감과 소득세, 자본소득 과세 등 증세 조치를 단행했다.

세출 삭감은 보육수당 폐지와 아동수당 중 다자녀 가산금 축소, 연금의 물가연동폭 억제, 실업수당이나 질병수당의 급부율 인하 등 전통적인 사회보장 급부 삭감을 중심으로 실시됐다. 이 과정에서 증세와 복지축소로 이중고를 겪은 스웨덴 국민이 강하게 반발한 것은 당연지사다.

그럼에도 1996년 사회민주당 당수가 된 예란 페르손 수상은 '빚진 사람에게 자유는 없다'며 재정 재건 필요성을 국민에게 호소했다.

이에 스웨덴 국민은 사회보장 급부 삭감을 포함해 세출 삭감으로 인한 고통을 감수했다. 그 결과 국가재정은 빠르게 회복됐고 1998년부터 흑자재정이 실현됐다.

울레 세테르그렌(Ole Settergren) 스웨덴 연금청 연금분석팀장은 연금개혁 당시 상황과 관련, "집권당인 사회민주당은 연금제도를 개혁하지 않아 국가 재정이 악화되면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우려를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야당 역시 여당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포함한 모든 정당에 비난이 가해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협력했다"며 "결론적으로 이런 제도가 도입된 것은 정당들이 연금재정 파탄에 따른 정치적 책임을 피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스웨덴 연금 운영 투명성 역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이정규 주스웨덴 한국대사는 "스웨덴 사회를 볼 때 가장 부러운 것은 투명성이다. 의회도 그렇고 정치인도 그렇고 투명성에 대한 의무가 굉장히 강하다"고 말했다.

그는 "투명하지 않은 부분이 있으면 굉장한 공격과 비난을 받는다"며 "사회 전반에 흐르는 투명성의 의무가 연금 운영자들로 하여금 섣불리 불건전한 투자를 못하게 하고 기금을 잘 운영하는 골격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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